프란시스코 마시아스 응게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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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력 장악==
마시아스 응게마는 스페인 식민정부 당시 몽고모(Mongomo)의 시장을 지냈으며 그후 지방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1968년 적도기니의 독립 직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까지 치른 뒤 당선되었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스페인 식민정부 당시 몽고모(Mongomo)의 시장을 지냈으며 그후 지방의회의 의원으로 활동했다. 1968년 적도기니의 독립 직전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결선투표까지 치른 뒤 당선되었다. 그가 대통령직을 역임하는 동안 적도기니는 "아프리카의 [[다하우 강제 수용소|다하우]](나치 강제 수용소)" 라는 별명을 얻었고 그 자신은 정치적 처형과 스페인에 대한 악의적인 라디오 연설로 악명을 떨쳤다. 독립전 적도기니 임시정부의 수상이었던 보니파시오 온도 에두(Bonifacio Ondó Edu)는 마시아스가 정권을 잡은 직후 투옥되어 굶주림 끝에 처형당했다. 그 밖에 전직 부통령을 비롯한 많은 정치 인사들이 구금되었으며 "자살" 한 것으로 알려졌다.
 
마시아스 응게마의 비인륜적인 폭력으로 인해 전체 인구의 1/3이 넘는 적도기니 국민들이 이웃 나라로 달아났다. 그의 정권을 유지시킨 3개의 축은 "연합노동당"(United National Workers' Party, PUNT, 독립이전 부터 존재하던 조직을 정당으로 개편)과 소년들로 이루어진 "사병 집단", 그리고 리우 무니(Río Muni)의 "에상기 일족"(Esangui clan) 이었다.
 
(United National Workers' Party, PUNT, 독립이전 부터 존재하던 조직을 정당으로 개편)과 소년들로 이루어진 "사병 집단", 그리고 리우 무니(Río Muni)의 "에상기 일족"(Esangui clan) 이었다. 그가 권력을 행사하는 수단이었던 군대와 대통령 경호대는 마시아스의 친척과 일족들에 의해 완전히 통솔되었다. 또한 그는 "지적인(intellectual)" 이라는 단어의 사용을 금지하고 어선을 파괴하고 어업을 금지하는 등의 편집증적인 행동을 보이기도 했다. 1976년 마시아스는 그의 이름을 아프리카식(Masie Nguema Biyogo Ñegue Ndong)으로 바꾸고 모든 적도기니 국민들의 이름을 아프리카식으로 개명할 것을 요구했다.
 
마시아스 응게마는 일생동안 많은 대마를 피웠고 그로 인한 과대망상과 자기숭배를 즐겼다. 그는 스스로 "기적의 사나이(Unique Miracle)" 혹은 "교육, 과학, 문화의 최고 달인" 이라는 수식어를 붙혔다. [[비오코 섬|페르난도포 섬]]은 그의 이름을 따 "마시에 응게마 비요고 섬" 이라는 아프리카식 이름으로 개칭했다. 1979년 그가 권좌에서 물러난 이후에는 "비오코 섬" 으로 다시 이름이 바뀐다.
 
==권력의 확장==
1971년 5월 7일 마시아스 응게마는 415조치를 발표하는데 이는 1968년 제정된 헌법을 무효화하고 입법,사법,행정부의 모든 권한 및 내각 구성권까지 모두 대통령에게 직접적으로 부여했다.
 
1971년 5월 7일 마시아스 응게마는 415조치를 발표하는데 이는 1968년 제정된 헌법을 무효화하고 입법,사법,행정부의 모든 권한 및 내각 구성권까지 모두 대통령에게 직접적으로 부여했다. 1971년 10월 18일 반포된 법령 1(Law 1)은 대통령이나 정부에 위협을 주는 인물은 예외없이 사형을 부과하도록 규정되었다. 1972년 7월 14일 그는 헌법 1(Constitutional Decree 1)을 반포해 자신을 종신대통령에 임명했다. 1973년 7월 29일 그는 1968년 헌법을 완전히 무효화 하고 마시아스 응게마와 그의 정당에 절대적인 권력을 주는 새로운 헌법을 반포했다.

헌법 6(Decree 6)을 반포해 사교육 혁파를 주장하고 모든 종류의 사교육을 금지시켰다. 그의 통치기간동안 적도기니에는 어떠한 경제개발 계획도 세워지지 않았고 공공기금 조성 체계도 존재하지 않았다. 응게마가 중앙은행의 총재를 살해한 이후 그는 국보로 지정된 모든 보물들을 자신의 집에 끌어 모았다.
 
==쿠데타==
1979년 8월 3일 그는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 음바소고]](Teodoro Obiang Nguema Mbasogo)에 의해 축출된다. 테오도로는 비오코의 군사 지도자를 역임했고 적도기니군의 부사령관 이었다.
 
1979년 8월 3일 그는 조카인 [[테오도로 오비앙 음바소고]](Teodoro Obiang Nguema Mbasogo)에 의해 축출된다. 테오도로는 비오코의 군사 지도자를 역임했고 적도기니군의 부사령관 이었다. 마시아스와 그의 방위부대는 한때 쿠데타에 저항하기도 했으나 결과적으로 마시아스는 버림받았고 8월 18일 숲 속에서 생포된다.
 
==재판과 처형==
 
최고군사회의가 1979년 8월 18일 열렸고, 마시아스 응게마 정권 당시의 폭정에 대한 증언과 증거들을 수집했다. 회의는 9월 24일 마시아스 응게마와 그 측근들을 재판하기 위한 군사재판을 소집했다. 10명의 피고에게 적용된 혐의는 학살, 살인, 공금횡령, 인권침해, 반역 등이었다.
 
검사들은 마시아스 응게마에게 사형을 구형했고 나머지 5명에게 30년형, 4명에게 1년형을 구형했다. 마시아스의 변호인측은 나머지 피고인들에게도 특별 범죄혐의가 있음을 근거로 무죄를 주장했다. 마시아스는 법정에서 자신이 한 행동이 결과적으로 국가를 위한 "넓은 의미의 선의"였음을 주장했다.

1979년 9월 29일 정오 판사들은 검사들의 구형보다 더 높은 형량을 선고하는데 마시아스와 5명의 공범을 사형에 처하고 그들의 재산을 몰수하며, 2명의 피고에게 14년형, 나머지 2명의 피고에게 4년형을 선고했다.
 
특별군사재판으로 이루어진 이 판결은 단심으로 끝났고 마시아스 응게마와 5명의 공범들은 같은날 저녁 6시 모로코군 소총부대에 의해 블랙 비치 감옥(Black Beach Prison)에서 총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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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책=[[적도 기니의 대통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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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1924년 태어남]]
[[분류:1979년 죽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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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적도 기니의 정치인]]
[[분류:적도 기니의 대통령]]
[[분류:총살된 사람]]
 
[[bg:Франсиско Масиас Нгуем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