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파엘 트루히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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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퇴임일 = 1938년 5월 30일, 1952년 8월 16일
|부통령 =
|부통령 명칭 = 야친토 베네토
|출생일 = [[1891년]] [[1월 24일]]
|출생지 = [[도미니카 공화국]], [[산 크리스토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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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녀 =
|서명 =
|전임 = [[호라시오 바스케즈]], [[마누엘 트론코소 드 라 외이]]
|전임 대수 = 35, 37
|후임 = [[야친토 베네토]], [[헥토르 트루히요]]
|후임 대수 = 36, 38
|웹사이트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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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와 경력 ==
=== 어린 시절 ===
[[도미니카 공화국]] [[산 크리스토발]]에서 작은 소매점을 운영하던 호세 발데즈 트루히요와 아이티계 여인이자 줄리아란 애칭으로 알려진 알타그라시아 몰리나 샤빌리에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11명의 아이들 중 3번째였다.
 
어린 시절을 비교적 큰 사고 없이 보냈고 6살 때 후안 힐라리우 메리노의 학교에 입학했고 7살 때 다른 학교로 전학갔으며 3 ~ 4년을 보내다가 16살 때 [[모스 부호]] 전신 연산자로 취직해 44의 회원이라는 작은 패거리에 가입했다. [[1916년]] 설탕 사업소에서 2년 동안 일했다.
 
=== 권력을 향해 ===
[[1916년]] [[제1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은 도미니카 공화국을 해외 채무 문제로 무력 점령했고 곧 도미니카군의 질서 회복을 위해 경찰대를 설립했는데 트루히요는 이를 통해 승진했고 [[1924년]] 미군이 철수할 때 트루히요는 그곳 담당관의 왼팔이 되었다.
 
[[1927년]] 육군준장이 되어 육군사령관으로 있다가 [[1930년]] [[산티아고]]에서 대통령 [[호라시오 바스케즈]]에 대한 반란이 일어났고 반란군은 수도 [[산토도밍고]]를 향해 행진했다. 트루히요는 반란군을 진압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2월 26일]] 반란군은 아무 저항 없이 수도 산토도밍고에 입성했고 바스케즈가 사임하자 반란군 지도자 [[라파엘 에스트레야]]가 임시 대통령직을 수행했다.
스테니오 빈센트
 
이에 트루히요는 1930년 대통령 선거에서 [[도미니카당]]의 후보가 되어 총 95%의 투표율 중에서 많은 수를 얻어 대통령이 되어 [[8월 16일]] 공식적으로 취임했다.
 
[[Image:PartidodeTrujillo.jpg|right|thumb|200px|트루히요를 선전하는 도미니카당의 선거 포스터]]
 
=== 트루히요 정부 ===
트루히요가 대통령에 취임한 지 3주 후 파괴적인 [[허리케인]]이 수도 산토도밍고를 덮쳐 3000명이 죽었고 미국 적십자에서 구호 자금을 얻어 도시를 재건했다.
 
[[1931년]] [[8월 16일]] 취임 1주년을 맞아 트루히요는 자신의 정당인 도미니카당을 도미니카 공화국 유일의 합법 정당으로 정했고 공무원들은 자신들의 급여 중 10%를 당에 기증했고 곧이어 시민들도 당원으로 가입했다. [[1932년]] 트루히요는 국회로부터 대원수 칭호는 받고 [[1934년]] 군대 사령관으로 승진했으며 곧 재선에 도전해 손쉽게 당선되었다.
 
=== 독재를 향해 ===
[[1936년]] 마리아 페르민 카브랄의 제안으로 의회에서 수도 산토도밍고를 트루히요란 지명으로 바꾸는 국민투표에서 압승을 거뒀고 트루히요의 고향 산 크리스토발은 국가 최고의 봉인 도시로 바꾸어졌다. 도미니카 전역에 트루히요의 동상이 세워지고 교량과 공공 건물에는 트루히요의 이름이 새겨졌으며 신문에선 트루히요를 선전해댔다.
 
[[1938년]] [[5월 30일]] 트루히요는 71세의 부통령 [[야친토 베네토]]를 새 대통령으로 지명했으나 대원수 칭호를 겸하면서 실질적으로 도미니카를 다스렸고 [[1940년]] [[3월 7일]] 베네토가 사망하자 [[마누엘 트론코소 드 라 외이]]가 대통령직을 수행하다가 [[1942년]] [[미국]]의 [[프랭클린 D. 루스벨트]]가 3기에 도전하는 것에 영향을 받아 다시 재선에 도전해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5월 18일]] 새로 취임해 10년 동안 도미니카를 다시 지배하다가 [[1952년]] [[8월 16일]] 동생 [[헥토르 트루히요]]에게 물려주었으나 명목상 대통령이었고 이후에도 실질적으로 도미니카를 지배했다.
 
=== 압박 ===
트루히요는 그의 재임기 동안 야당을 포함한 많은 단체로부터 압박을 받았는데 특히 42의 지도자 [[파울 리노]]와 [[쟈니 아베스]]도 반체제 인사였고 둘 다 비밀 경찰에 의해 살해당했다.
 
국외로도 반체제 인사를 숙청해 [[미라발 자매]]를 제거했고 [[1956년]]에는 [[콜럼비아 대학]]에서 트루히요의 만행을 강연하던 망명객 [[헤수스 갈린데스]] 교수를 조종사 제럴드 머피를 고용해 살해했으나 갈린데스 교수와 머피, 트루히요와의 관계는 아직 미궁에 남아 있다.<ref>1957년 2월 25일 《라이프》 42:24 ~ 31</ref>
 
=== 이민 ===
1930년대 동안 [[일본]]의 [[군국주의]] 독재와 [[스페인 내전]], [[유대인]] 탄압을 피해서오는 망명객들을 받아들였고 인종 차별을 방지하는 도미니카 고유의 방책을 펴고 [[1938년]]에는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10만 명이란 관대한 조건으로 최대 유대인 난민 허용치를 제안했다.
 
[[1940년]] 협정이 체결되었고 1만 6000에이커의 땅에 5월에 도착해 800명의 정착민이 도착했으며 대부분은 나중에 미국으로 이사갔다. 이후에는 세금 기반을 확대하기 위해 유럽에서 오는 피난민들을 많이 받아들여 아이티계 주민들을 추방하는 정책을 펴 결국 [[1937년]] [[파슬리 학살]]로 이어지게 된다.
 
 
 
[[스테니오 빈센트]]
==관련 항목==
* [[포르피리오 루비로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