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희재 (조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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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래는 한량 출신으로 누이인 [[희빈 장씨]]의 덕으로 관직을 얻었다고 알려졌지만 실제로는 무과에 급제하여 벼슬을 얻었고 1683년 3월 13일에는 이미 지위가 종6품 포도부장이었다. [[희빈 장씨]]를 궁녀로 주선한 [[동평군]] 이항과는 오랜 지기였다.
 
 
1680년 [[삼복의 난]]의 여파로 장희재 남매의 후견을 맡았던 종백부 장현의 집안이 [[명성왕후]] 김씨의 사촌 오라비 [[김석주]]에 의해 몰락하였고, 같은 해 말엔 누이 [[장희빈|장옥정]]이 숙종의 승은을 입자마자 [[명성왕후]] 김씨에 의해 강제로 출궁되었다. 1683년 3월 13일, [[정명공주]]의 잔치에서 노래를 부른 첩 숙정을 취객의 희롱에서 도망치게 하였다 하여 [[인현왕후]] 민씨의 큰아버지 [[민정중]]에게 호된 매질을 당했다.
 
 
[[명성왕후]] 김씨의 3년장이 마쳐진 후 [[자의대비]]의 주선으로 1686년 초에 [[장희빈|장옥정]]이 다시 환궁하여 12월에 정식으로 후궁으로 봉해졌다. 그녀가 왕자를 생산하고 중전으로 봉해지자 종3품 훈련원부정, 정3품 내금위장, 종2품 금군별장 등을 역임했고, 1692년에는 정2품 총융사로 승진했다. 이 후 정2품 한성판윤도 맡다가 1694년 갑술환국 당시엔 종2품 포도대장을 맡았다.
 
 
갑술환국의 여파로 인해 사형당할 위기에 몰렸지만, 세자 (후의 [[조선 경종|경종]])에게 미칠 화를 염려한 영의정 [[남구만]]등 소론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제주]]에 부처된다. 유배령이 내려진 직후 숙원 최씨를 독살하려 하였다는 혐의를 받아 압송되어 국문되었지만 무고함이 밝혀졌다. 그 이후에도 자작극으로 아버지 장형의 묘비를 훼손시켰다는 혐의를 받는 등 수차례 죽을 고비를 넘겼다.
 
 
1701년 8월에 [[인현왕후]]가 죽자 희빈 장씨가 인현왕후를 무고(巫蠱; 남을 저주함)하였다는 혐의로 9월 23일 장희재에게 처형의 명이 내려졌고 25일에는 희빈 장씨에게 자진을 명하는 비망기가 내려졌다. 남구만을 필두로 한 소론 대신들과 일부 노론 대신들의 강력한 반대로 명이 실행되진 않았지만, 10월 8일 희빈 장씨에게 승정원을 통한 자진의 명이 내려졌고 10월 10일에 희빈 장씨의 자진 사실이 공식 발표되었다.
 
 
희빈 장씨의 사후에 한양으로 압송된 장희재는 10월 29일 군기시 앞에서 복주(伏誅; 형벌을 받아 죽음)당했다. 11월엔 벌이 부족하다는 노론의 주장으로 시체가 능지처사되었다. 장희재의 사후 장형의 신위와 제사가 자형인 김지중과 그 아들에게 재산 일부와 함께 기한적으로 맡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