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민대표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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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2월 [[김창숙]]·[[박은식]]·[[원세훈]] 등 독립운동가 15인이 1921년 2월 '''<우리 동포에게 고함>'''이라는 격문을 발표했다. 이 격문에서는 무능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비판과 함께 국민대표회의를 열어 무장투쟁세력을 포함한 통일적인 정부와 독립운동방향을 수립할 것을 주장하였다.<ref name=autogenerated1>강만길 외 173명, 국민대표회 개최과정, «한국사», 한길사</ref> 이에 대해 [[김구]]를 비롯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각료들은 국민대표회의 소집운동을 ''정부패궤운동''이라고 규정하고 반발하였다.<ref>곽지연, 국민대표회 반대세력 연구 (1921-1922),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석사논문, 2008, 6쪽</ref>
 
한 편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의 외교노선에 반대하고 무장투쟁 노선을 주장하던 [[신채호]]·[[박용만]]·[[신숙]] 등을 비롯한 8개 단체 대표들은 1920년 9월 [[북경]]에서 [[군사통일회]]를 조직한다. 여기에 참가한 [[하와이]] [[독립단]] 대표 [[권성근]]은 [[이승만]]의 위임통치 청원 사실을 폭로하고, 이로써 [[군사통일회]]는 [[이승만]]을 성토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불신임'''을 결의하게 된다. 곧이어 이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 불신임에 따른 제반문제를 논의하고 국내외의 독립군을 망라하여 국민대표회의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5명의 준비위원을 뽑았다.
 
이어 1921년 5월 6일에는 [[만주]]지역의 [[김동삼]]·[[이탁]]·[[여준]]등이 [[액목현(額穆縣) 회의]]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개혁안>을 작성하고 국민대표회의 소집을 추진한다. 이렇게 국외 각지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를 부인하고 개조하자는 요구가 이어지자 [[상하이]]에서도 [[여운형]]·[[안창호]] 등에 의해 국민대표회의 소집문제가 제기된 후 '''국민대표회의 기성회'''가 결성되었고, 이를 토대로 1921년 8월 ''''국민대표회주비회'''가 성립되었다.<ref>강만길 name=autogenerated1 173명, 국민대표회 개최과정, «한국사», 한길사</ref>
 
==경과==
===국민대표회주비회===
그러나 '''국민대표회주비회'''의 활동은 [[김구]] 등 [[대한민국 임시정부]]옹호파의 반대, 대회경비에 따른 자금난 등으로 인해 부진하였다. 뿐만 아니라 여러 독립 운동 세력은 [[워싱턴]]에서 열린 [[태평양회의]]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인민대표대회]]에 기대를 걸고 있었기 때문에 두 회의 개최 기간 중에는 일시 중단되었다.<ref name=autogenerated2>Hdic http://hdic.kr/wiki3/index.php/국민_대표_회의</ref> 그러나 두 국제회의에서 예상과 달리 큰 성과를 얻지 못하게 되자 결국 국민대표회주비회는 1922년 다시 활동을 재개하였다.
 
===국민대표회의 개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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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노선의 일치보다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통성을 중시하여 모인 '''개조파'''의 [[여운형]]·[[김동삼]]·[[안창호]] 등은 [[상하이]]와 [[만주]]를 기반으로 삼고 있었다. 개조파는 임정이 전 민족적 운동인 3.1운동의 결과물이며 현재도 국민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점과 성립 이후 민족해방운동을 지도해 왔다고 인식하였다. 따라서 이들은 창조파가 국민대표회의에서 새로운 최고기관을 만든다면 국민들이 인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ref>박윤재, 1920년대 초 민족통일전선운동과 국민대표회의, «학림 제17호»,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1996년, 170쪽</ref>
 
한편 종래 무장독립론을 주장했던 [[이동휘]]는 개조론의 입장을 취하고 있었다.<ref>Hdic http://hdic.kr/wiki3/index.php/국민_대표_회의<name=autogenerated2 /ref>
 
====개조파의 탈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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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해 개조파 위원 57명이 반대성명을 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이에 반대하여 내무총장인 [[김구]]는 '''내무령 제1호'''로서 국민대표회의의 해산을 명령했다. 이에 일부 [[이르쿠츠크파]] [[고려공산당]] 중심의 창조파는 [[노령]]으로 돌아가 [[레닌]] 정부의 승인을 얻어 새 정부를 수립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결국 '한'정부를 따라갔던 창조파 인사들은 1924년 2월말을 전후하여 [[중국]]지역의 각 단체에 복귀해 개별운동을 전개하게 되었다.
 
한편 국민대표회의 내에는 창조파와 개조파 이외에 중도파로서 통일적 대단합을 주장하던 인사가 있었으나 그 수가 극히 적었고, 이후 회의는 6개월간 개최되었으나 본격적인 안건을 처리하지 못한 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막을 내리게 되었다. <ref>Hdic http://hdic.kr/wiki3/index.php/국민_대표_회의<name=autogenerated2 /ref>
 
국민대표회의 결렬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임시정부]]는 자신의 법통성을 부인하고 새로운 통일기관의 결성을 지지하여 [[민족유일당운동]]이 전개되었다. 이것은 앞서 민족통일전선을 구축하려 시도했던 국민대표회의의 목표와 맥락을 같이하는 것이라 평가할 수 있다.
 
==주석==
 
<references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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