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민족청년단: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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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정도 청년단체를 활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여 [[1946년]] 중반 비밀리에 약 500만 달러와 미군 장비를 지원하고 훈련 고문이로 미군 대령 한사람 등을 특파하여 족청 결성을 지원하였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6쪽</ref>
 
문제의 소지를 없애기 위해 자금은 군정청이 아닌 일본 [[도쿄]]의 [[더글러스 맥아더|맥아더]] 사령부로부터 나왔다. 맥아더 사령부는 차량 지원에서부터 제복까지 모두 지원해 주었다.<ref name=autogenerated2>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6~267쪽</ref> <ref>최장집 외, 《해방전후사 인식 4》(한길사, 1989) 74, 94쪽</ref><ref>[[안호상]], <안호상 박사 회고록: 족청 해산>(문화일보) 1995년 3월 23일자 19면</ref><ref name=autogenerated1>그레고리 핸더슨, 박행웅·이종삼 옮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울아카데미, 2000) 224~225쪽</ref> [[안호상]]은 족청의 이론적 근거를 제공해 주었다.<ref name=autogenerated3>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8쪽</ref>
 
족청은 [[김활란]], [[백낙준]], [[최규동]], [[현상윤]] 등으로 이사회를 구성하였고 경기도 수원에 있는 구 일본군육군병원 건물에 족청 중앙본부를 설치하고 이곳에 훈련소를 마련하였다. 소련의 항의를 피하기 위해 비밀리에 수원 훈련소에서 약 7만명이 훈련을 받았다. 교육 목적은 장래에 군대였으며 이중 상당수가 국군에 편입되어갔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name=autogenerated2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6~267쪽</ref>
<ref name=autogenerated1 />
<ref>그레고리 핸더슨, 박행웅·이종삼 옮김 《소용돌이의 한국정치》(한울아카데미, 2000) 224~225쪽</ref>
 
족청은 [[1946년]] [[10월 9일]] 창설 당시 300명에 불과했으나, 1년 뒤인 [[1947년]] [[11월]]에는 30만 명으로, 2년 후에는 [[8월]] 115만명, 그해 가을 120만 명으로 늘어났다. [[1947년]] [[4월]] [[한국광복군]] 총사령관이던 [[지청천]]이 귀국해 [[대동청년단]]을 결성하면서 족청에 대해서도 합류를 요청했지만, [[이범석 (1900년)|이범석]]은 합류를 거부하고 [[대동청년단]]과 경쟁관계에 들어갔다.
 
국수적이고 심하게 전체주의적 발상이라는 비판도 있었다.<ref>강준만, 《[[한국현대사산책]]》〈1940년대편name=autogenerated3 1권〉([[인물과사상사]], 2004) 268쪽</ref>
 
[[1948년]] [[5월 10일]]의 [[대한민국 제헌국회 총선]]에선 6명이 족청을 표방하여 당선되었으며, 나중엔 원내교섭단체를 구성할 정도로 세력이 커졌다. 그러나, [[1949년]] 모든 청년단체를 통합, 단일화하라는 [[이승만]]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통령]]의 지시에 의해 결국 [[대한청년단]]에 흡수, 해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