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산 파동: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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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청년당원들은 계속해서 [[유진산]]에게 정계은퇴, 당 총재직 사퇴, 전국구 후보 사퇴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강요햇으며, [[유진산]]의 자택 앞에서 유진산계열 [[신민당 (1967년)|신민당]] 청년당원들과 패싸움을 벌였다.<ref name="자파1"/> 이들의 소란은 [[1971년]] [[5월 7일]] [[신민당 (1967년)|신민당]] 중앙당사에서의 난동사태로까지 이어졌다.<ref name="자파1"/>이후 [[유진산]]은 당직을 사퇴하였다.
 
이에 대해 [[신민당 (1967년)|신민당]] 비주류인 [[김대중]]은 6인 수권위원회의 구성원 중 [[고흥문]], [[홍익표]], [[정일형]] 등 3인과 협의해 [[유진산]]을 당에서 제명하고 총선 기간 동안 자신이 당수 권한대행을 맡는 수습안을 발표했다.<ref name="자파1">이영훈, 《파벌로 보는 한국야당사》 (에디터, 2006) 111페이지</ref>
 
그러나 운영위원회 소집에 앞서 [[김영삼]], [[이철승]], [[이중재]], [[김재광]], [[김형일]] 등은 비공식적인 의견교환을 통해 [[김대중]]의 당수권한대행직 장악을 저지키로 하고 당헌에 따라 운영위원회 부의장에게 당수 권한대행을 맡기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ref name="자파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