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웅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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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 별군관(別軍官)이 되었다. 80년 [[음력 7월]] 별군관의 신분으로 제2차 [[수신사]] [[김홍집 (조선의 문신)|김홍집]]의 수행원으로 일행을 따라 [[일본]]에 건너갔다. 함께한 [[이조연]](李祖淵), [[강위]](姜瑋) 등과 함께 동양삼국의 합력을 취지로 하는 [[흥아회]]에 참석하였으며, [[도쿄]]에 머물고 있던 개화승 [[이동인]]의 소개로 일본 재야 인사들과 접촉하였다. 수행원의 신분이었지만 [[일본]]의 새로운 문물을 시찰한 그는 돌아와 1881년 교련병대 창군을 지도하였다.
 
[[1881년]] 함경남도병마절도사가 되었다가 다시 중앙으로 돌아와 [[별기군]] 창설에 가담하여 5군영(五軍營)에서 지원자 80명을 선발하여 별기군을 만들고 좌부영관(左副領官)으로서 별기군의 운영을 주도했다. 이어 별기군의 교련소 우부령관 등을 지냈으며, 이후 신식 군대를 양성하면서 [[일본]]과 유착하였다. 별기군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된 [[임오군란]] 때는 군인들이 일본 공관을 습격할 계획으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일본 측에 미리 통보했고, 소요가 확대되어 운웅렬의 집이 부서지고 일본공관도 습격당하자 공사 일행과 함께 [[나가사키 시|나가사키]]로 피신했다. 원산으로 피했다가 일본 승려 이사카와가 화물처럼 가마니로 말아서 일본으로 밀항시켰다는 말도 있다.<ref name="실록친일파"> {{서적 인용
|저자=임종국
|기타=반민족문제연구소 엮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