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웅우 왕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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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룬'''(재위 1629~1648)은 전 왕들과는 다르게 통일을 목표로 한 팽창 정책보다는 현상유지만을 목표로 하였다. 라카인과는 동맹을 맺었고, 타이의 아유타야 왕국과도 우호를 증진시키는 한편, 아유타야가 샨족의 반란을 자극하지 못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잠시의 안정 후 다시 1634년 몬족의 반란이 발생하여 이를 진압한 따룬은 불안정한 다시 수도를 하부의 버고에서 상부의 잉와로 옮기게 된다. 이후 따룬은 신진 세력으로 등장한 [[네덜란드]]와도 우호를 돈독히 하여 마침내 완전히 국내외의 정치상황을 안정시킬 수 있었다.
 
이러한 바탕 위에서 따룬은 내치에 주력하여, 짜욱세의 관개시설을 개수하여 농토를 넓히고 전국적인 [[인구조사]]를 시행하였으며, 이에 따라 [[세법]]을 명확히 하고 지역의 단위 인구 수와 농토의 크기에 따른 세금 징수 체계를 확립하였다. 또한 [[관습법]]을 손질하여 정리하고 새로운 법전을 편찬하였는데, 이 법전은 이전처럼 [[팔리어]]로만 작성하지 않고 일반 민중도 읽을 수 있도록 [[버마어]]로 작성한 것이었다. 따룬은 신실한 불교 신자로서 불교 건축물 조성에도 힘썼으며, 불교의 정화를 위해 노력하여 승려들이 계율을 보다 엄격히 지키도록 하였다.
 
==쇠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