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웅우 왕조: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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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룬 이후 따웅우 왕조의 버마는 서서히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따룬 시기에 내치는 안정되었으나 거꾸로 긴 평화 때문에 신경쓰지 않은 군사력이 약해졌고, 그의 뒤를 이은 [[삔들레]](재위 1648~1661)의 시기에는 [[남명]]의 마지막 황제를 구심점으로 하는 패잔병으로 구성된 유입 세력이 북동부에서 마음껏 약탈을 벌이며 활개를 치는 것조차 제대로 통제하지 못하였다. 이들은 다음 왕인 [[삐 (왕)|삐]](재위 1661~1672) 왕 시기에 청으로 인도되었으나, 왕의 권위는 이미 상당히 약화되어 있었다. 이를 만회하기 위해 [[민예쪼틴]](재위 1673~1698) 왕은 아유타야 정벌을 시도해 보지만 무참히 실패하여 왕권은 더욱 약화되어 버렸다. 유럽의 [[영국]]과 네덜란드, [[프랑스]] 세력에 대해서도 외교적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끌려다니기만 하는 상황이 지속되었다.
 
나중에는 란나 왕국도 독립을 선언하고, 바인나웅 시대에 복속시켰던 인도 동부의 [[마니푸르]]와의 전투에서도 패배하여 국왕 [[뜨닌가누웨]](재위 1714~1733)가 전사하는 등 주변 세력의 지속적인 영토 잠식이 이어졌다. 그러다가 결국 따웅우 왕조는 몬족과 프랑스 연합군에 의해 왕궁이 점령당하고 왕이 포로로 잡히는 수모를 겪으며 멸망하기에 이르렀다.
 
==같이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