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시마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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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일본 신화에 따르면 일본에서 최초로 태어난 8개의섬([[아와지 섬]], [[시코쿠]], [[오키 제도]], [[규슈]], [[이키 섬]], 쓰시마, [[사도가 섬]], [[혼슈]])의 하나이다. [[3세기]]에는 [[야마타이코쿠]]에 대하여 복속되어 있었다<ref>《三国志》東夷伝</ref>. 고대에는 {{출처|신라의 행정 기관}}과 일본의 행정 기관이 놓였을 뿐만 아니라 쓰시마는 역사시대부터 한국과 일본 사이에서 양속관계 및 두 나라를 잇는 다리 역할을 해 왔다.
 
삼국시대 초에는 대마도를 ‘진도(津島)’라고 불렀다. [[고려]] 말부터 한국에 조공을 하고 쌀 등의 답례를 받아갔다. 6세기전반 [[아스카 시대]]에는 [[쓰시마 도주]](對馬島主)가 일본왕부의 임명장을 받기도 하였다.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평화 시에는 한국과 일본 간의 교역을 독점하였으며, 전쟁 시에는 두 나라 사이의 징검다리 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곳이 한때 [[왜구]]의 소굴이 되자, [[1389년]]([[고려]] [[창왕]] 2년)에는 [[박위]]가 쓰시마를 토벌하였다.
 
조선국왕은조선 국왕은 [[왜구]]들에 대한 회유책(懷柔策)으로 통상의 편의도 봐주고 또 귀화 정책을 쓰는 등 우대를 해주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이곳을 근거지로 한 [[왜구]]의 행패가 여전하자 세종 때인 [[1419년]] [[음력 6월]] [[조선]]의 [[세종]]이 [[이종무]]에게 명을 내려 군사 1만 7285명을 동원하여 [[대마도 원정|쓰시마를 정벌]]하는 강경책을 쓰기도 하였다.
 
그러나 쓰시마 도주의 간청으로 왜인의 통상을 위하여 3포를 개항하고 그들의 편의를 도모했으며, 또한 조선의 국왕이 쓰시마도주에게 관직을 내려 그들을 조선의 영향력 아래 두기 시작하였다. 그 후에도 조선에 근접한 [[왜구]]의 근거지로서, 이것을 무마하려는 한국의 해방정책(海防政策)에 따라 특수한 대접을 받아왔다. 그후에도 조선은 쓰시마에 대한 영향력을 오래 유지했으나,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근거지가 되면서부터 차츰 영향력이 약화되었다.
 
[[에도시대에도 시대]](江戸時代)에는 [[쓰시마 후추 번]](對馬府中藩)이 설치됐어서 쓰시마 도주인 소(宗) 가문이 [[쇼군]](將軍)으로부터 [[다이묘]](大名)로 임명을 받았다. [[메이지 유신]](明治維新)을 계기로 1871년에 [[폐번치현]](廢藩置縣)으로 인하여 쓰시마 후추 번은 폐지됐어서 [[이즈하라 현]](嚴原縣)이 됐다. 그리하여 새로운 정부가 쓰시마 섬을 관리하게 됐다. 그리고 1876년에 [[나가사키 현]](長崎縣)에 편입됐다. 소 가문은 일본 귀족으로 들어갔고, [[대한제국]] 마지막 황녀인 [[덕혜옹주]]는 [[일본 제국|일본]]의 강요로 소 가문과 정략 결혼하기도 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 [[이승만]]은 정부 수립 직후인 1948년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쓰시마)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1948년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또한 1949년 1월 7일에도, 같은 주장을 하였다. <ref name="chosun0725">{{뉴스 인용| url =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08/07/25/2008072501220.html| 작품명 =조선일보| 제목 = <nowiki>[Why] "대마도는 우리 땅" 역사 근거 많다 </nowiki>| 저자 = 이한우 기자 | 인용 = 이 대통령의 발언은 그때가 처음이 아니다. 그는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을 선포한 지 사흘 뒤인 8월 18일 성명에서 '대마도는 우리 땅'이니 일본은 속히 반환하라고 했다. 일본이 항의하자 이승만은 외무부를 시켜 그해 9월 '대마도 속령(屬領)에 관한 성명'을 발표했다.| 언어 = 한국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