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경 (조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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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 (위)|정원]] 2년([[255년]]) 8월 2일, 옹주자사로서 촉의 대장군 [[강유]]와 조서(洮西)에서 싸워 대패하고 적도성을 지켰다.<ref name="s04"/> 당시 왕경은 정서장군 · 가절 · 도독옹양제군사 [[진태]]에게 강유와 [[하후패]]가 군사를 3분하여 진격하려 한다고 알렸으며, 진태는 강유 등이 군사를 3분할 수 없다고 보고 왕경을 적도에 주둔시키고 진태가 도착하는 것을 기다려 적을 공격하려고 했다.<ref name="s22">진수, 《삼국지》 권22 환2진서위노전</ref> 그러나 왕경은 진태가 도착하기 전에 강유와 교전하여 대패하고 만여 명만 겨우 건져 적도성을 지켰고, 강유는 곧 적도성을 포위했다.<ref name="s22"/> 진태와 협력하여 강유의 퇴로를 끊으려는 움직임을 보여, 강유 등이 퇴각하여 겨우 구제되었다.<ref name="s22"/> 그때 식량이 열흘분도 채 남지 않았을 정도였다.<ref name="s22"/>
 
[[감로 (위)|감로]] 연간에는 상서가 되었다.<ref name="s09"/> 감로 5년([[260년]]) 5월, 황제 [[고귀향공]]은 시중 [[왕침]], 산기상시 [[왕업]]과 함께 왕경을 불러들여 전횡을 부리던 [[사마소]]를 치고자 했다.<ref name="s04">진수, 《삼국지》 권4 삼소제기</ref><ref name="hz-s04">습착치, 《한진춘추》 (진수, 《삼국지》 권4 삼소제기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ref><ref name="z02">방현령 등, 《진서》 권2 제기 제2</ref> 왕경은 옛날 [[노 소공]]이 권신 [[계손의여]]를 치려다가 도리어 계손씨와 숙손씨의 반격을 받아 쫓겨난 일을 들어 황제에게 간했으나, 황제는 오히려 목숨을 내던질 각오를 굳히며 왕경의 간언을 듣지 않았다.<ref name="hz-s04"/> 왕침과 왕업은 이를 사마소에게 전하려 했고, 왕경도 끌어들였으나, 왕경은 이를 따르지 않았다.<ref name="zzk-s04">부창, 《진제공찬》 (진수, 《삼국지》 권4 삼소제기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ref> 결국 왕침과 왕업은 둘이서만 사마소에게 가서 이를 전했고,<ref name="s04"/><ref name="z02"/><ref name="hz-s04"/><ref name="se-s04">곽반, 《위진세어》 (진수, 《삼국지》 권4 삼소제기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ref> 이를 들은 사마소가 준비를 하고 반격하여 도리어 고귀향공이 시해당했다.<ref name="s04"/><ref name="z02"/><ref name="hz-s04"/> 왕경은 태후의 조서에 따라 가족들과 함께 체포되어 정위에 넘겨졌고,<ref name="s04"/> 반역죄로 처형당했다.<ref name="z02"/> 사로잡혔을 때 어머니에게 사과했으나, 어머니는 도리어 낯빛을 변하지 않고 이 날이 언젠가 오리라고 여겼다며 함께 죽게 되었으니, 무슨 한이 있겠냐고 답했다.<ref name="hz-s09"/>
 
==사후==
사례교위 시절 종사로 벽소한 상웅(向雄)은 왕경이 처형당한 동시에서 곡했다.<ref name="hz-s28">습착치, 《한진춘추》 (진수, 《삼국지》 권28 왕관구제갈등종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ref> 또, 옹주자사 시절의 관리 황보안(皇甫晏)은 가재를 내어 장례를 치러줬다.<ref name="se"/> [[태시 (진)|태시]] 원년([[265년]]), [[서진 무제]]는 조서를 내려 왕경의 손자에게 낭중(郞中)을 주었다.<ref name="hz-s09">습착치, 《한진춘추》 (진수,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