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트프리트 하인리히 추 파펜하임 백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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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적 관점에서 파펜하임의 행동은 훌륭했다. 그의 방법은 숙련되었고 그의 개인적인 무용은 언제나 눈에 띄었다. 그래서 대다수는 [[브라이텐펠트 전투 (1631년)|브라이텐펠트]]에서의 실패에 강렬한 돌격을 지휘할 때마다 결코 행복하지 않았던 이 맹렬한 기병지휘관의 전술의 영향이 적지 않다는 점을 설명하지 못한다. 그러나 그의 영향력 아래에 있던 실지의 황제군을 관심과 기술로 재집결시키고 파펜하임은 [[라인 강]] 하류와 [[베저 강]]에서 [[스웨덴의 구스타프 아돌프|구스타프 아돌프]] 휘하의 군대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스웨덴 왕을 위한 좀 더 시급한 증원은 파펜하임의 작고 재육성된 군대에의해 독일의 북서부에 묶여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작전은 광범위했고 그의 쉼없는 움직임은 카셀에서 슈타데(stade), 힐데스하임에서 마스트리히트(Maastricht)를 제압했다. 새로운 황제군의 원수에 임명되고 그는 [[발렌슈타인]]과 합류하도록 소환되었다. 그리고 [[작센]]에서 스웨덴군에 대항하는 대원수를 지원하도록 명받았다.

그러나 다시금 라인 남부에 위치한 [[쾰른]]으로 급파되었다. 그의 부재로 대전쟁은 급박해졌고 파펜하임은 급박하게 소환되었다. 그는 그의 기병대와 함께 [[뤼첸 전투]]의 중반에 나티났다. 그의 분노에 찬 공격은 일순간은 성공적이었다. 마스턴 무어(Marston Moor)전투의 루퍼트가 [[크롬웰]]을 자신의 가장 뛰어난 라이벌로 생각했듯이 지금 파펜하임은 구스타프 아돌프를 그렇게 여겼다.

스웨덴왕이 죽은 거의 동시에 전장의 다른 지역에서 파펜하임 역시 치명적인 상처를 입었다. 그는 당일 혹은 그의 사체가 보존된 플라이센부르크(Pleissenburg)가 있는 [[라이프치히]]로 가는 도중의 아침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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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독일의 귀족]]
[[분류:독일의 군인]]
[[분류:전사한 사람]]
 
[[ar:غوتفريد هاينريش، كونت بابنهاي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