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흠: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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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인 고당의 제의 지방으로 이름 높은 번화가로서 유명한 것으로부터, 관리들은 거기서 놀고 있었으나, 화흠은 휴일에는 문을 닫고 집에서 나오지 않았다. 그는 논의에 대해서도 항상 공평했고, 상대를 상처 입히는 일을 하지는 않았다.<ref> 《위략(魏略)》에 의하면, 젊은 무렵 화흠을 용의 머리, 병원을 용의 배, 관녕을 용의 꼬리라고 하여, 「일룡(一龍)」이라 칭했다.</ref>
이때 같은 군의 [[도구홍]](陶丘洪)과 서로 명성을 두고 경쟁을 하였은데, [[영제]](劉宏)의 치세로 기주자사(冀州刺史) [[왕분 (후한)|왕분]](王芬)이 황제를 폐립시키려고 할때, 그 계책에 동참하려 하였던 도구홍을 엄하게 충고한 것으로 부터, 도구홍도 화흠을 인정하게 되었고 얼마 지나지 않아, 효렴(孝廉)으로 천거되어 낭중(郎仲)이 되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병이 났기 때문에 사직하였다.
 
=== 후한의 신하로서의 행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