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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마소]]가 대군을 일으켜 [[촉한|촉나라]]를 공격하여 끝내 멸망시켰는데, 이때 두예는 진서장군부(鎭西將軍府)의 장사(長史)였다. 당시 위나라의 진서장군은 [[종회]](鍾會)였는데, [[종회]]는 두예의 동료인 진서장군부 군사(軍司) [[위관 (서진)|위관]](衛瓘)과 더불어 [[사마소]]에게 [[등애]](鄧艾)가 반란을 일으키려 한다고 모함하여 [[264년]] [[등애]] 부자가 죽게 만들었다. 두예가 주변 사람들에게 [[위관 (서진)|위관]]의 이같은 행위를 비판하자, [[위관 (서진)|위관]]은 두예에게 직접 와서 사과하였다.
 
[[서진|진나라]]를 세운 [[사마염]](司馬炎)은 [[268년]] 하남윤(河南尹) 자리에 있던 두예에게 관리들에게 적용할 출척고과법(黜陟考課法)을 만들라고 하였으나, 두예가 이에 반대하는 글을 올린 것이 받아들여져 시행되지 않았다.
 
[[270년]] [[선비족]]의 독발수기능(禿髮樹機能)이 [[호열]](胡烈)을 전사시키고 위세를 떨쳤다. 당시 진주(秦州)자사였던 두예는 안서장군(安西將軍)을 대행하던 석감(石鑒)에게 선비족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현지의 군사들이 궁핍하기 때문에 봄까지 기다렸다가 토벌하겠다고 하였다. 석감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조정에 두예가 군사를 이끌 능력이 부족하다고 했기 때문에 함거에 갇힌 채 불려와서 재물로 죄값을 치르는 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석감이 선비족 토벌에 실패함으로써 두예의 의견이 옳았다는 것이 입증되었다. 이후 탁지상서(度支尙書)에 임명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