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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는 익주에서 사우종사(師友從事)를 역임한 초□(譙[[파일:초영시.png]])<ref>[[파일:초영시.png]]은 음이 알려지지 않은 글자이다. 譙[[파일:초영시.png]]의 자는 '''영시'''(榮始)이기 때문에, 대개 '''초영시'''(譙榮始)라고 대체하여 부른다.</ref>이다. 초주는 아버지를 일찍 여의고 형과 함께 살았으며, 성장한 이후 학문에 정진했고 자신의 가난한 집에 대한 이야기를 하지 않고 성격은 진실되어 꾸미지 않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220년]] [[조비]](曹丕)가 [[후한 헌제|헌제]](獻帝)에게 선양을 받고 [[위 (삼국)|위나라]]를 세웠을 때 익주에서는 헌제가 해를 당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에 [[유비]](劉備)의 신하들이 황제로 추대하고자 했으며 초주는 [[황권]](黃權) 등의 여러 신하들과 함께 황제에 즉위하여 [[한나라]]의 뒤를 이을 것을 청하는 글을 올렸다. 이로 인해 유비는[[유비]]는 [[221년]] 4월 제위에 올랐다.
 
[[유선 (후주)|유선]](劉禪)이 등극한 후 [[제갈량]](諸葛亮)에 의해 권학종사(勸學從事)에 임명되었다. [[제갈량]] 사후에 대장군(大將軍) [[장완]](蔣琬)이 익주자사(益州刺史)를 겸임할 때는 전학종사(典學從事)로 임명되어 익주(益州)의 학자들을 총괄했다.
 
대장군 [[강유]](姜維)가 북벌에 몰두하여 나라가 피폐해지자 잦은 정벌이 나라를 위태롭게 한다는 내용을 담은 〈구국론(仇國論)〉이라는 글을 썼다.
 
[[263년]] 위나라의 장군 [[등애]](鄧艾)가 험준한 산길을 지나 진격해 오자, 지형만 믿고 방비를 소홀히 했던 촉군은 제대로 대처하지 못하고 무너졌다. 신하들은 [[오 (삼국)|오나라]]나 남중으로 피신하자는 의견을 냈으나, 초주는 위나라에 항복하자고 주장했다.
초주의 의견을 받아들인 유선은[[유선 (후주)|유선]]은 스스로 밧줄에 묶인 채 태자와 신하들을 거느리고 등애에게[[등애]]에게 항복하여 촉나라는 멸망하였다.
 
위나라의 권신 [[사마소]](司馬昭)는 초주를 양성정후(陽城亭侯)에 봉하고 위나라 조정으로 불러들였다. 그러나 초주는 병이 들어 [[267년]]에야 [[뤄양|낙양]]에 도착할 수 있었다. [[270년]], 70이 넘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