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젊어서부터 용맹으로 이름을 떨쳤다고 하나, 자세한 활약은 전하지 않는다. [[손량]](孫亮)이 즉위한 후 관동장군(冠東將軍)이 되었다.
 
[[252년]] 12월 [[위 (삼국)|위나라]]에서 대군을 일으켜 동흥(東興)을 공격해 오자, [[제갈각]](諸葛恪)을 따라 참전하여 위군 진영을 기습하러 나섰다. 위군은 잔치를 벌이면서 방비를 소홀히 했기 때문에 급습에 성공하여 [[한종]](韓綜)이 이끄는 선봉부대를 무찌르고 한종을[[한종]]을 베는 공을 세웠다. 이 패배로 기가 꺾인 위군은 더 이상 진격하지 못하고 후퇴했다.
 
[[255년]] [[관구검]](毌丘儉)의 반란에 가담했던 [[문흠]](文欽)이 위군에게 패하여 오나라로 쫓겨 오자, 정봉은 위군과 싸워 전과를 올리고 문흠을[[문흠]]을 맞아들이는 데 성공했다. [[257년]] [[제갈탄]](諸葛誕)이 수춘에서 반기를 들었을 때도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오나라의 실권을 잡고 있던 [[손침]](孫綝)은 총명한 자질을 지니고 있던 [[손량]](孫亮)이 장성하면서 국사에 의욕을 보이자 훗날을 두려워하여 조회에 나오지 않았다. [[손량]] 역시 손침을[[손침]]을 눈엣가시로 보았기에 제거하려 했으나, 계획이 새어나가 도리어 폐위당하고 회계왕(會稽王)으로 강등되었다. 뒤이어 황제로 추대된 [[손휴]](孫休) 역시 손침을[[손침]]을 제거하려 했는데, 손휴와[[손휴]]와 함께 거사를 모의하던 [[장포 (오나라)|장포]](張布)가 정봉을 추천하여 [[손침]] 제거에 가담하게 되었다. 손침이[[손침]]이 제거된 후 대장군으로 승진하였다.
 
[[263년]] 위군의 공격으로 곤경에 처한 [[촉한|촉나라]]가 원병을 요청하자, 정봉은 명을 받고 촉한을 구원하기 위해 수춘부터 성도에 이르기까지 공격을 시작했으나 정봉의 부대가 성도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촉나라가 멸망한 후였기 때문에 정봉은 회군했다. [[268년]] 11월에는 제갈탄의[[제갈탄]]의 아들 [[제갈정]](諸葛靚)과 함께 합비를 공격했으나, [[서진|진나라]]의 여음왕(汝陰王) 사마준(司馬駿)에게 격파당했다. [[269년]]에는 곡양(穀陽)을, [[270년]] 1월에는 와구(渦口)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했다. 정봉은 말년에 교만한 모습을 보였는데, 이 때문에 정봉을 못마땅하게 본 [[손호]](孫皓)는 그의 가족들을 임천(臨川)으로 이주시켰다.
 
[[271년]] 12월 세상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