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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지]]》 권57에 자신의 전이 있다.
 
난세를 피해 강동으로 가, 광릉 사람 [[위정]](衛旌)과 함께 낮에는 오이 농사로 생계를 유지하며 밤에는 공부했다. 살던 곳이 군의 호족 회계 사람 초정강(焦征羌, 《오록》에 따르면, 이름은 초교(焦矯)며, 옛날 정강령이었다)의 땅으로, 그를 두려워하여 위정과[[위정]]과 같이 오이를 헌상하러 방문했다. 초정강은 보즐 일행을 심히 멸시했으므로 위정은[[위정]]은 심히 치욕을 느끼고 분노했으나, 보즐은 초정강의 멸시를 묵묵히 받아내었다. 위정이[[위정]]이 보즐에게 분노하자, 보즐은 대답하여 애시당초 우리가 빈천하니 빈천한 대로 대우받았을 뿐인데 무엇을 부끄럽게 여기냐 했다.
 
[[손권]](孫權)이 토로장군이 되자 불러 주기로 임명했다. 해가 지나자 질병으로 관직을 면하고 [[제갈근]](諸葛瑾), [[엄준]](嚴畯)과 함께 오중에서 유학하며 명성을 얻었다.<ref name="wo">위요 찬, 《오서》</ref> 손권은[[손권]]은 보즐에게 해염장을 제수하고, 다시 불러 거기장군 동조연으로 삼았다. 손권이[[손권]]이 서주목이 되자 보즐로 치중종사를 삼고, 무재로 천거했다.<ref name="wo"/>
 
[[건안]] 15년([[210년]]), 파양태수가 되었고, 교주자사 · 입무중랑장으로 전임되어 무야리 천여 명을 거느렸다. 이듬해 사지절 · 정남중랑장이 더해졌다. 당시 교주에는 [[유표]]가유표가 임명한 창오태수 [[오거]]와오거와 후한의 교지태수로 형제들과 함께 교주에서도 현재의 북베트남 지역에서 세력을 떨치고 있던 사섭이[[사섭]](士燮)이 할거하고 있었다. 오거는 겉으로는 보즐을 따르면서 속으로는 거슬렀다. 보즐은 우호를 가장하여 오거를 회유하여 서로 만났고, 그 자리에서 오거를 베어 위세를 떨쳤다. 한편 사섭도[[사섭]]도 형제들을 이끌고 보즐에게 귀순하여, 교주는 오나라의 세력권으로 편입되었다. 익주군의 호족 [[옹개]](雍闓) 등이 태수 정앙을정앙(正昂)을 살해하고 오나라에 귀부하기를 구하자, 보즐은 이들을 받아들여 평융장군이 더해지고, 광신후에 봉해졌다.
 
[[연강]] 원년([[220년]]), 손권의[[손권]]의 명령으로 여대가 보즐을 대신했다. 보즐은 교주 사람 1만 명을 데리고 장사로 갔으며, 마침 [[유비]](劉備)가 쳐들어와 무릉만이가 준동하였으므로 손권의[[손권]]의 명령에 따라 익양에 주둔했다. 유비가[[유비]]가 패배한 후 영릉과 계양 각지에서 일어난 소요를 곳곳마다 진압했다. [[황무]] 2년([[223년]]), 우장군 · 좌도호로 승진하고 임상후로 봉해졌다. 동 5년([[226년]]), 가절을 받고 구구로 주둔지를 옮겼다.
 
[[황룡 (오)|황룡]] 원년([[229년]]), 손권이[[손권]]이 황제가 되자 표기장군이 되었고 기주목을 겸임했다. 같은 해에 서릉을 도독하고, 육손을[[육손]](陸遜)을 대신하여 국경을 진무했다. 촉한과 맺은 동맹 조약에 따르면 기주는 촉한의 영토가 되므로, 기주목에서 해임되었다. 교사 여일이 횡포를 부려 수많은 사람이 잡혀가자, 손권에게[[손권]]에게 상소를 올려 여일을 주살하게 했다. [[적오]] 9년([[246년]]), [[육손]]을 대신하여 승상이 되었다.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계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