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쇼다 사건: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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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쇼다 사건'''은 [[아프리카]] [[수단]]에서 [[영국]]과 [[프랑스]] 사이간에 벌어진 사건이다. [[19세기]] 말,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원료와 시장을 확보한 후 남는 자본을 투자하려고 식민지 획득에 손을 걷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유럽|영국,독일,프랑스]] 등은 힘을 키워 나갔다. [[데이비드 리빙스턴|리빙스턴]]과 [[헨리 모턴 스탠리|스탠리]]의 탐험으로 아프리카가 등장하자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로 진출, 영국은 [[케이프타운]]과 [[카이로]]를 잇는 [[종단 정책]]을 펼쳤다. 이에 맞선 [[프랑스]]는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를 이어내는 [[횡단 정책]]을 열었다. 프랑스가 이내 먼저 [[파쇼다]]에 도착하여 자국의 국기를 개양하자 영국이 철수를 명령하였고, 이 사건이 파쇼다 사건이다. 그러나 이내 프랑스의 양보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파쇼다 사건'''은 아프리카를 차지하려는 유럽 열강사이의 사건이다.
 
== 전개 개요==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의 수행을 위해 키치너 장군은 [[수단]] 지방에서 일어난 반란을 평정하면서 [[철도]]를 부설하고 [[1898년]] 9월 [[하르툼]]에 도달했다. 한편, [[프랑스]]의 아프리카 [[횡단 정책]]은 [[1894년]] 점령했던 프랑스 령 [[수단]]과 [[아프리카]] 동쪽 해안인 [[지부티]]를 연결하기 위해 시작됐으며, 마르샹 대위가 [[1898년]] 7월 [[파쇼다]](Fashoda)에 도착해 [[프랑스]] 국기를 게양했다. 이 소식을 들은 영국의 키치너는 급히 파쇼다로 와서 마르샹에게 철수를 요구했다. 그러나 마르샹 대위가 이를 거절함으로써 한동안 긴장 상태가 계속됐다. 결국 이 문제는 [[영국]]과 [[프랑스]]의 본국 정부로 넘어갔다. [[1899년]] 양국 사이에 타협이 이루어 지고 긴장됐던 양국은 이로 인해 가까워져서 [[1904년]]에는 영국,프랑스 화친 협정을 맺었다.
[[19세기]] 말, [[자본주의]]가 발달하면서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이 원료와 시장을 확보한 후 남는 자본을 투자하려고 식민지 획득에 손을 걷었다. 이러한 정책으로 [[유럽|영국,독일,프랑스]] 등은 힘을 키워 나갔다. [[데이비드 리빙스턴|리빙스턴]]과 [[헨리 모턴 스탠리|스탠리]]의 탐험으로 아프리카가 등장하자 유럽 열강은 아프리카로 진출, 영국은 [[케이프타운]]과 [[카이로]]를 잇는 [[종단 정책]]을 펼쳤다. 이에 맞선 [[프랑스]]는 [[알제리]]와 [[마다가스카르]]를 이어내는 [[횡단 정책]]을 열었다. 프랑스가 이내 먼저 [[파쇼다]]에 도착하여 자국의 국기를 개양하자 영국이 철수를 명령하였고, 이 사건이 파쇼다 사건이다. 그러나 이내 프랑스의 양보로 손쉽게 해결되었다.
 
{{토막글|역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