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권: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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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장의 장수로서의 삶 ===
일찍이 군리가 되었고 후에 익주목 [[유장 (후한)|유장]](劉璋)이 주부(主簿)로 발탁했다.
 
[[장송 (후한)|장송]](張松)이 [[유비]](劉備)의 입촉 시 그에 상응한 호응을 보여주기 위해 황권을 시켜 [[장로 (후한)|장로]](張魯)를 공격하라는 건의를 했으나, 오히려 [[장송 (후한)|장송]]을 꾸짖고 [[유장 (후한)|유장]]에게 간언하여 말했다.
 
{{인용문2|좌장군(유비)은 용맹한 명성을 떨치고 있습니다. 지금 이곳으로 이르도록 요청하더라도, 부하로서 그를 대우한다면 그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할 것이고, 빈객으로 접대한다면 주인은 계란을 쌓아놓은 것 같은 위험을 갖게 될 것입니다. 단지 국경을 폐쇄하고 황하가 맑아지기를 기다릴 수밖에 없습니다.}}
 
하지만 황권의 간언에 귀를 기울이지 않은 [[유장 (후한)|유장]]은 오히려 [[유비]]의 심기에 누가 될까봐 황권을 좌천시켜 광한현장(廣漢縣長)으로 보냈다. 이후 [[유비]]가 촉을 공격한 이후에도 성문을 걸어잠그고 [[유비]]에게 대항했으나, [[유장 (후한)|유장]]의 항복 소식을 듣고 그제서야 마음을 돌렸다. 그의 충심에 감복한 [[유비]]가 그를 중용하였다.
 
=== 촉한의 장수로서의 삶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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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국지연의》에서의 황권 ==
 
《[[삼국지연의]]》에는 [[유비]]의 입촉을 반대하는 [[유장 (후한)|유장]]의 신하중 한 사람으로 등장하여, 이가 부러졌다. 그러나 [[유비]]가 서촉을 재패하였을때 [[유파]](劉巴)와 끝까지 중전에 나타나지 않자 [[유비]]가 직접 찾아가 그들을 권유하자 [[유비]]를 따르게 된다.
[[219년]]에는 [[법정 (촉한)|법정]]과 함께 [[한중 공방전]]의 일등 공신이 되었으며, [[222년]]에 [[이릉 대전]]에 참전하여 북방을 지켰으나 [[육손]](陸遜)의 화공으로 대패하자 위나라로 투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