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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마도]]에서 무역을 할 수 있게 항포를 열어 달라고 요구하여 [[조선]]에서는 [[3포]](부산포, 제포, 염포)를 열었다. 그러나 그 뒤에도 소란을 피우지 않겠다는 약속을 깨뜨렸으며, 급기야 [[1555년]](명종 10년)에 [[전라남도]] 연안에 있는 달량포(達粱浦)<ref>전라남도 해남군 북평</ref>에 왜선 60여 척이 쳐들어왔다.
 
왜구들은 먼저 [[영암]], 달량을 점령하고 어란포(於蘭浦)<ref>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 어란리</ref>, [[장흥]], [[강진]], [[진도]] 등을 짓밟으며 갖은 만행을 저질렀다. 이때 절도사 [[원적]], 장흥부사 [[한온]] 등은 전사하고 영암 군수 [[이덕견]]은 사로잡히는 등 사태가 매우 긴박하였다. 이에 조정에서는 호조판서 [[이준경]]을 도순찰사, [[김경석]]·[[남치훈]]을 방어사로 임명하고 전주부윤 [[이윤경]]을 파견하여, 영암에서 적을 크게 파하여 그들을 몰아내었다.
 
그해 10월 [[대마도]]주 [[소 요시시게]]는 이들 왜구의 목을 잘라 보내어 죄를 사과하고 세견선의 증가를 호소해 왔으므로 조정에서는 이를 승낙, 세견선 5척을 증가시켰으며 이를 계기로 [[비변사]]를 상설기관으로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