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바야카와 다케히코: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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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83년]] 프로 야구 드래프트 회의에서 2순위로 [[히로시마 도요 카프]]에 입단, 같은 포지션을 갖고 있는 [[오사나이 다카시]]를 누르고 입단 첫 해부터 클린업을 형성시켜 [[1984년]]에 [[일본 프로 야구 신인왕|신인왕]]을 차지했다. ‘빨간 헬멧의 젊은 주인’({{lang|ja|赤ヘルの若大将}})으로서 [[기누가사 사치오]]나 [[야마모토 고지 (1946년)|야마모토 고지]]의 후계자로서 많은 기대를 받았다. 야마모토 고지가 은퇴한 후는 팀의 4번 타자로서 ‘파워가 있으면서 찬스에 강하다’라고 평을 받을 정도로 기대되는 것도 많았다(우승 경험도 있다). 다리는 빠르지 않고 내야 안타는 적었지만 수비는 [[1루수]]외에도 팀내 사정으로부터 [[2루수]]나 [[3루수]]를 지킨 경험도 있다.
 
그 후 [[1991년]]경부터 팀은 야마모토 고지의 지휘하에서 [[노무라 겐지로]]나 [[마에다 도모노리]] 등과 같은 젊은 선수들이 활약하는 한편 고바야카와는 선발에서 제외되는 경우가 많아 좀처럼 출전 기회를 가질 수가 없었다. [[1996년]] 시즌 종료 후 자유 계약 선수로 [[도쿄 야쿠르트 스왈로스|야쿠르트 스왈로스]]에 이적하면서 이듬 해인 [[1997년]] [[4월 4일]]의 개막전([[요미우리 자이언츠]] 전·[[도쿄 돔]])에 [[노무라 가쓰야]] 감독으로부터 “너는 대학 1학년부터 4번, 프로에서는 신인왕, 그러니까 이적 1년째도 반드시 할 수 있다”라고 말해 5번 선발 멤버에멤버로 발탁 되는되었다. 상대 투수는 당시 [[1994년]]부터 1996년에 걸쳐 3년 연속 개막전 완봉 승리를 기록하고 있던 요미우리의 [[사이토 마사키]]로부터 '''3타석 연속 홈런'''을 때려내는 등<ref>개막전의 3타석 연속 홈런은 1951년 4월 8일의 [[모리시타 시게요시]]([[오사카 긴테쓰 버팔로스|긴테쓰]]), 1979년 4월 7일의 [[다시로 도미오]]([[요코하마 베이스타스|요코하마 다이요]])가 기록한 이후 사상 세번째였다.</ref> 일명 ‘노무라 재생 공장’ 아래에서 부활을 이뤄 팀의 리그 우승과 일본 시리즈 우승에 기여했다. [[1999년]] 시즌 종료 후 16년간의 현역 생활을 은퇴했다. 이듬해인 [[2000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방송협회|NHK]]와 [[산케이 스포츠]]에서 프로 야구나 [[메이저 리그]]의 해설을 맡았다.
 
[[2006년]]부터는 현역 시절 친정 팀인 히로시마의 타격 코치로 부임해 [[2008년]] [[8월 21일]]에는 대리 감독인 제프 리브시([[마티 브라운]] 감독이 모친의 장례로 귀국을 위해 대리 감독을 맡았다)가 심판의 판정에 항의하면서 퇴장 처분을 받아 이후 9회초부터 ‘대리 감독 대행’을 맡았다. 브라운 감독의 사임에 맞춰 팀 타선의 부진에 대한 책임을 물어 [[2009년]] 시즌 끝으로 코치직에서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