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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소리에서 [[동편제]]에만 구애받지 않고 경기도 향토음악제인 [[경드름|경제]](京制)를 많이 활용하였다. 이것이 가문에서 문제가 되어 할명(割名)을 당하였다. [[조선성악연구회]]를 창립하였다. 서울로 올라와서 [[원각사 (극장)|원각사]] 간부를 맡았으며, 이때 [[조선 고종|고종]] 앞에서 어전 광대의 영예를 누리기도 했으며 감찰직을 제수받았다. 원각사가 폐쇄된 뒤에는 궁내부 별순검 직무를 3개월간 수행하기도 했다. 충정공 [[민영환]]과 함께 중국과 미국 등지를 다닌 적도 있다.
 
소리로만 부르던 《춘향가》 《심청가》를 창극화하여 공연하였으며, [[이동백]]·[[정정렬]] 등과 함께 [[1923년]] '조선 성악연구회'를 설립하여 제자 양성에 힘썼다. 대표적인 제자들로 [[장판개]], 박중근, 김정문, 박봉래, [[박록주]] 등이 있다. 유성기 음반 87면에 다수의 [[판소리]]들을 녹음하였다.
'청중과 교감하는 것이 진정한 예술이다'라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관습에 얽매이지 않고 청중이 원하는 방식으로 소리를 불렀다. 이 때문에 집안 및 선후배, 동료들 사이에서 지탄을 받기도 했으나, 대중들에게는 매우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
 
[[정창업]](鄭昌業) 소리에 감복하여 동편제의 판소리에 서편제의 발랄하고 구성진 요소를 가미하여 독특한 자기 스타일을 개척하였다. 따라서 많은 대중에게 갈채를 받은 반면 자기 가문에서 환영을 받지 못하고 [[박기홍(朴基洪)]]·[[전도성(全道成)]]과 같은 전통적인 동편제 명창들에게서 많은 비판을 받았다. 〈박타령〉이 특출했다.<ref name="글로벌"/>
 
그의 소리는 정교하지만, 동시에 [[아니리]]가 부족했다는 평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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