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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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마그누스'''({{llang|la|Gnaeus Pompeius Magnus|그나이우스 폼페이우스 망누스}}, [[기원전 106년]] [[9월 29일]] – [[기원전 48년]] [[9월 29일]])는 [[로마 공화정]] 말기의 위대한 장군이자 정치인이었다. 그는 [[로마 공화정]] 말기 원로원파(귀족파)의 지도자로 [[크라수스|마르쿠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와 함께 [[제1차 삼두정치|삼두정치]]체제를 이끌었으며 [[카이사르의 내전|카이사르와의 내전]]에서 패하고 [[이집트]]에서 죽었다.
 
== 생애 ==
=== 초기의 생애 ===
폼페이우스의 아버지 [[폼페이우스 스트라보]]는 피세노 지방의 부유한 가문으로 그의 집안은 전통적인 로마의 지배 귀족은 아니었지만 기원전 92년 법무관, 기원전 89년에는 집정관을 지냈다. [[동맹시 전쟁]]이 벌어지자 폼페이우스는 18살의 나이로 아버지를 도와 함께 참전했고 큰 활약을 보였다. [[천병희]] [[단국대학교]] 명예교수가 번역한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범우사)에 따르면, 군대내에서 반란이 일어날 조짐이 보이자 "아버지를 배신할 것이라면 차라리 나를 밞고 가라"고 호소하여 반란이 일어나지 않도록 했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폼페이우스는 뛰어난 지도력을 보였다.
 
[[기원전 87년]], [[가이우스 마리우스]]와 [[술라]]의 내전때 아버지가 죽고 그는 아직 어린 관계로 마리우스파의 숙청을 피했고 피세노에서 가문의 재산과 토지를 지켰다. [[기원전 83년]] 술라가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을 끝내고 그리스에서 이탈리아로 귀환했을때 폼페이우스는 3개의 [[로마 군단|군단]]을 모아 술라와 함께 마리우스파에 대항했다. 이때 폼페이우스는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군사적 재능을 보였고 술라는 [[독재관]]이 된 후 자신의 딸과 결혼시켰다.
 
=== 군사적 성공 ===
==== [[시칠리아]]와 [[아프리카]] ====
술라는 [[이탈리아]]에서 내전이 거의 끝나가자 폼페이우스에게 [[시칠리아]]와 [[아프리카]]로 도망친 마리우스 일파의 잔당소탕을 맡겼다. 약 2년에 걸친 소탕작전에서 폼페이우스는 마리우스파 잔당에 대한 잔인하고 처절한 응징으로 "십대 백정"이라는 별명을 얻을 정도였고 뛰어난 군사작전으로 임무를 끝마쳤다. 아프리카에서 돌아오면서 폼페이우스는 술라에게 자신의 개선식을 거행해 줄 것을 요구했으나 거절당하자 자신의 군단의 해산을 거부하고 로마 성문에서 시위를 벌였고 술라는 결국 개선식을 허락했다. 이때 술라는 농담삼아 그에게 마그누스(''MAGNUS'')라는 별명을 붙였는데 폼페이우스는 이것을 자신의 별칭으로 계속 사용했다.
 
술라가 은퇴하고 죽고난 [[기원전 77년]] 폼페이우스는 전직집정관 레피두스가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서 [[히스파니아]]로 도망친 마리우스 잔당[[세르토리우스]]의 진압을 자청하고 나섰다. 아직 29세에 불과하고 아무런 로마 공직 경험이 없었던 폼페이우스에게 군사지휘권을 주고 원정을 보내는 것은 당시 법에 어긋나는 것이어서 원로원은 망설였다. 그러자 폼페이우스는 다시 한번 자신의 군단을 해체하지 않겠다고 원로원에 우겼고 결국 [[원로원]]은 ''집정관 대리''라는 임시직함을 주고 군사 지휘권을 부여하여 히스파니아로 파견했다.
 
==== 세르토리우스와 스파르타쿠스 전쟁 ====
당시 히스파니아에는 이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메텔루스 피우스]]가 파견되어 3년재 세르토리우스와 싸우고 있었으나 별다른 전과를 내지못하고 있었다. 세르토리우스는 게릴라 전술로 메텔루스의 정규군을 괴롭히고 있었고 특히 폼페이우스에게 진압당한 레피두스의 부하들까지 가세하여 세력이 커지고 있었다. 폼페이우스가 메텔루스 피우스에게 가세하여 로마 정규군은 공세를 더욱 강화했으나 세르토리우스 전쟁은 완전한 승패가 나지 않은 게릴라 전으로 5년을 더 끌었고 [[기원전 72년]] 세르토리우스가 부하에게 배반당해 살해당함으로써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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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71년]] 폼페이우스는 [[루비콘 강]]을 넘어서도 자신의 군단을 해산하지 않고 로마로 와서 원로원에 개선식과 다음해의 [[집정관]]직을 요구했다. 폼페이우스는 술라가 새로 제정한 법에의해 집정관 자격이 없었다. 그러자 크라수스도 자신의 8개군단을 해체하지 않고 집정관직을 요구했다. 두사람은 서로 비밀협약을 맺고 원로원을 압박하여 집정관에 당선되었다.
 
=== 동방의 재편 ===
집정관이 된 후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술라체제에 반대하는 두 가지 법을 통과시켰다.
* 호르텐시우스법의 부활 : 술라 이후 약화된 호민관의 권력과 지위를 다시 부활시킴, 호민관은 원로원의 승인 없이도 법률을 발의할 수 있게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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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원전 61년]] 로마에 돌아온 폼페이우스는 [[9월 29일]] 그의 생일에 동방에서의 빛나는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통산 세 번째 개선식을 벌였다.
 
=== 카이사르와 삼두정치 ===
5년간 로마를 떠나 있다가 비로소 귀환한 폼페이우스는 [[로마]]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보수파 귀족들은 그를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고 있었으며 그가 혼인동맹을 통해 [[원로원]]의 귀족파와 연합하려는 시도를 거부했다. 원로원과 손잡고 퇴역병을 위해한 토지를 분할하고 자신의 동방 정책에 대한 인준을 받으려던 폼페이우스는 난관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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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파들은 [[키케로]]의 추방에 대해 앙심을 품고 여전히 카이사르와 결탁한 폼페이우스에 대하여 반대입장을 고수했다. 키케로가 망명에서 돌아와 폼페이우스를 옹호했으나 여전히 원로원 파의 의심을 받았다. 한편 [[기원전 56년]] 카이사르는 [[루카 (이탈리아)|루카]]에서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를 차례로 불러 회담을 가졌고 그들의 삼두 정치의 전략을 재수정했다.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는 [[기원전 55년]]의 집정관직 선출을 약속받고 각각 히스파니아와 시리아 속주의 속주 지휘권을 갖기로 하고 카이사르는 갈리아의 지휘권을 5년 더 연장하기로 합의했다. 그러나 이번 선거에는 반대파도 입후보했기 때문에 결국 투표는 전례없는 뇌물과 부패로 얼룩진 가운데 크라수스와 폼페이우스는 집정관직을 얻었으나 폭력과 혼란이 로마사회를 어지럽게 했다. 폼페이우스는 로마에 상설 대극장을 지어 기증했다.
 
=== 내전으로 치닫는 로마 ===
그러나 삼두 정치체제는 그 종말로 다가갔다. 기원전 54년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가 아이를 낳다가 죽음으로써 폼페이우스와 카이사르를 이어주는 연결고리가 없어졌고 크라수스는 파르티아를 상대로 전쟁을 벌이다가 전사하고 만 것이다. 또한 로마 민중들사이에서 폼페이우스 보다 카이사르가 더 유능한 장군으로 여겨졌다. 카이사르는 다시 한 번 혼인 동맹을 맺을 것을 요청하였으나 폼페이우스는 거절하고 대신 [[기원전 52년]] 카이사르의 주요 정적인 [[카이킬리우스 메텔루스]] 가문과 결합하여 원로원파에 전향적인 모습을 보였다. 이때부터 원로원파는 카이사르보다는 폼페이우스가 덜 위험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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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가이사르가 갈리아에서 [[베르킨게토릭스]]와 싸우는 동안 폼페이우스는 차근차근 카이사르의 숨통을 죄는 작업에 착수하였다. 여러가지 개혁에 착수하면서 폼페이우스는 뇌물과 부정 선거에 대하여 소급하여 처벌할 수 있는 법률을 만들었는데 이것은 카이사르의 임기가 끝나면 그를 기소하려는 의도였다. 이것은 카이사르의 계획을 모두 물거품으로 만드는 것이었고 폼페이우스는 한걸음 더 나아가 [[기원전 51년]] 카이사르가 군대를 모두 해산하지 않으면 집정관직을 수행할 수 없도록 만들었다. 폼페이우스는 점점 나이가 들어감에 따라 쇠퇴하고 있었고 카이사르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원로원파의 정쟁 도구로 그는 점점 파국으로 달려갔고 이제 내전은 피할 수 없어 보였다.
 
=== 몰락과 죽음 ===
처음에 폼페이우스는 카이사르가 [[이탈리아]]에 한발자국만 들여놓으면 군대를 모아 그를 격퇴 할 수 있다고 호기있게 주장했다. 그러나 [[기원전 49년]] 카이사르가 [[루비콘 강]]을 건너 군단을 이끌고 반도를 휘몰아쳐 내려오자 폼페이우스는 로마를 포기하고 남쪽으로 퇴각했고 동방으로 건너가 군대를 재조직하여 카이사르와 맞서려고 했다. 너무 서둘러 로마를 버린 탓에 보수파들은 군자금도 제대로 가져가지 못했고 로마에서 그들의 군자금 규모를 발견한 카이사르는 그 엄청난 규모에 놀랐다고 한다.
 
내전은 히스파니아와 [[북아프리카]], [[그리스]]에서 차례로 벌어졌다. 카이사르는 히스파니아에서 돌아와 위험을 무릅쓰고 [[아드리아 해]]를 건너 추격전을 벌이다가 이탈리아의 본진으로부터 차단되었고 디라키움에서 폼페이우스의 진지를 공격하다 격퇴되었다. 그러나 폼페이우스는 완전한 승기를 잡지 못하고 결국 카이사르는 이탈리아에서 증원군을 받는 데 성공했고 폼페이우스는 [[기원전 48년]] [[파르살루스 전투]]에서 카이사르에게 대패했다. 보수파들은 뿔뿔이 도망갔고 폼페이우스도 식솔을 거느리고 도망길에 올랐다. 그는 [[이집트]]로 건너가 다시 세력을 규합하기로 작정하고 이집트의 왕 [[프톨레마이오스 13세]]에게 의탁할 예정이었다. 그러나 프톨레마이오스는 이미 카이사르에게 기울었고 폼페이우스는 결국 [[기원전 48년]] [[9월 29일]] 자신의 58번째 생일날, 이집트에 상륙하다가 죽임을 당했다.
 
== 연표 ==
* [[기원전 106년]] [[9월 29일]] — 태어남
* [[기원전 83년]] — [[술라]]가 [[미트라다테스 6세]]와의 전쟁에서 돌아오자 그와 연합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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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암살된 사람]]
 
[[an:CneuGneu Pompeyo Magno]]
[[ar:بومبيوس الكبير]]
[[az:Qney Pompe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