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지도원: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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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비에트 연방의 정치지도원 ==
=== 배경 ===
정치지도원 제도는 [[소비에트 연방]]의 공산 혁명 이후 생겨났다. 당시 소련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 그리고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로 대표되는 군사 엘리트의 정권탈취에 대한 과도한 두려움이 '정치지도원'이라는 개념 생성의 주 원인이 된다. 일단 장교라는 계급은 부여되었지만 애초에 모든 인간이 평등하다는 이념을 근저에 깔고 있는 마르크스/레닌주의 체제 특성상 초창기에는 사병들이 장교에게 명령은 고사하고 경의를 표할 필요조차 없었으므로 장교로서의 권한은 사실상 전무했다.
 
여기에 충분한 군사교육을 받은 사람, 특히 장교는 거의 예외없이 제정 러시아 시절의 군인들이었기 때문에 언제 정부, 즉 공산당을 배신할지 모른다는 두려움도 있었다. 당연히 이런 우려를 할 만큼, 초창기 소비에트 연방의 장교들 중 공산당원의 비율은 턱없이 낮았다. 초기에는 이런 사정상 장교들이 공산당원이 되기 싫어했지만, [[1920년]]대 이후가 되고 나서는 장교들이 공산당원이 되고 싶어도 쉽게 받아주지 않았다. 군사 엘리트가 정권탈취를 위해 당에 접근하려는 것이라는 선입견이 컸던 것. 사실 이때까지의 장교들 상당수가 차르 체제에서 교육을 받은 전 부르주아 계급이었기 때문에 그런 우려 자체는 그리 이상한 건 아니었다.
 
제정 러시아의 부활을 막기 위해 정치위원 시스템을 군에 도입, 군이 당의 명령에 불복하거나 반란을 시도할 가능성을 없앰과 동시에 병사들에게 사상적 기반을 구축하고, 아울러 지나치게 급락한 군사지휘관의 권위를 대신 행사할 수 있는 각급 부대의 정치지도자로서 운용하려 했다.
 
=== 특징 ===
정치지도원들은 병력지휘 또는 작전과는 전혀 상관없이 지휘관을 감시하기 위한 용도로만 만들어진 군인들이였으므로 전문 군사 지식이 없었기에 지휘에는 별로 쓸모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급은 해당지휘관과 비슷하며 권한은 지휘관과 동등하였다. 그 이유는 정치장교 체제가 처음 도입된 소련 적군은 부대 운용계획을 수립하는 장교가 당원이든 비당원이든 일단 지휘권이 없었기 때문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 원칙에 따라, 부대 지휘관이 수립한 작전을 프롤레타리아 병사 대중의 대표인 정치지도원의 승인을 받아 병사 전원의 만장일치라는 형식으로 지휘를 받게 돼 있었으므로 지휘관과 권한이 동등할 수 밖에 없었다.
 
이 구조는 정치지도원이 지휘관의 군사적 전문성을 철저하게 보장하는 경우에는 유용한 구조임이 적백내전에서 입증되었으나, 정작 전문 지휘관들의 사상적 기반을 의심하는 정치지도원들의 계속적인 반문이 기본이 되엇으므로 결국 아무리 좋은 결과라 해도 지휘체계가 이원화되면서 의사결정 및 작전지휘의 효율이 크게 저하되고, 최악의 경우에는 지휘체계가 군사적 문외한에게 완전히 넘어가는 대참사로 이어지고 말았다. 전쟁을 총 지도해야 할 당 군사위원회가 군사 비전문가들이 워낙 많았고, 군사작전의 정치적 효과를 지나치게 중시했기 때문에 일선 지휘관들의 효율적인 건의를 무시하는 경우가 너무 많았다. 당연히 정치지도원은 당 중앙의 뜻에 복종하는 것이 원칙이었고, 덤으로 군사경험이 없는 관계로 눈앞에서 병사들이 다 죽어나가는 판에도 자신의 지시로 인해 무슨 결과가 나올지 이해하지 못했다.
 
정치지도원이 당 중앙과 완전히 따로 놀면서 동시에 군사지휘관에게 철저 복종하는 상황을 제외한 거의 모든 상황에서 지휘관이 둘 있는 셈이니, 서로 의견이 안 맞을 경우 부하들만 난처해진다. 전투 중에 둘이 지휘관과 정치지도원의 의견이 대립되어 합의점을 보지 못하고 있는 사이에 불쌍한 사병들만 죽어나고, 지휘관이 아군 전사율을 줄이기 위해 기획한 효율적인 작전은 무시되며 정치적 대의나 당 중앙의 의사 외에는 다른 것을 생각할 능력이 없는 정치지도원이 제안한 자살행위 수준의 공격 또는 방어임무만 수행하게 된다.
 
이 체제는 [[1939년]] 핀란드와의 겨울전쟁에서 소련군의 막대한 손실을 초래한 원인 중 하나이며, [[이오시프 스탈린]]도 적백내전 이후의 소련-폴란드 전쟁 당시 정치지도원으로서 바르샤바 전투에서 패배한 전력이 있다. 원래 소련이 폴란드 영내까지 파고들었다가 대패한 후, 모스크바 근처까지 후퇴했던 적도 있을 정도였다.
 
=== 장점 ===
그러나 이 시스템도 잘 작동하면 나름대로 효과적이었다. 군사지휘관의 지휘권이 보장되면서 정치지도원이 실제 이론상의 원래 임무인 병사들의 전의 고양에 주력하는 경우, 효율적인 지휘관이 지휘하는 광신적인 병사들로 구성된 이상적인 부대가 될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 사례로, 스탈린그라드 전투 당시 62군 사령관 바실리 추이코프 중장과 62군 정치장교 쿠즈마 구로프, 그의 상급부대인 남부전선군 사령관 예레멘코 상장과 남부전선군 정치장교 니키타 흐루쇼프의 조합. 특히 쿠즈마 구로프는 군사적으로도 자신에게 지휘권이 있었던 NKVD 부대까지 추이코프에게 넘겨주면서 철저하게 정치적 지원에만 주력했다.
 
그러나 그런 장점도 사실은 정치지도원의 영향력을 축소하는 것이 좋지 않느냐는 수많은 전훈에 압도된 지휘관들이 위기상황에서 숙청의 위험을 무릅쓰고 억지로 정치지도원의 권한을 축소한 결과 드러난 것이었다.
 
=== 몰락 ===
결국 당 군사위원회조차 그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독소전쟁중인 [[1943년]]부터 이때까지 누적된 정치지도원의 폐단을 해결하기 위해 스탈린이 직접 나서 정치지도원의 배속 수준과 권한을 대폭 조정했다. 일단 정치지도원은 통상 연대급 이상에만 배치하고, 그나마도 지휘관의 정치적 보좌 겸 최후까지 전투의지를 잃어서는 안 되는 참모장교로서의 임무만, 그것도 연대나 사단급 제대에서나 수행하게 되어서 정치지도원들이 지휘관의 작전에 간섭할 권한을 대폭 축소해 버린 것이다. 이후 정치지도원의 역할은 주로 병사들의 사기 상승을 위한 선전과 정치교육으로 거의 제한됐다.
 
또한 적어도 지휘권 행사를 위해서는 충분한 군사 교육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뒤늦게나마 상부가 깨닫았기에 수많은 정치지도원들이 억지로 훈련소에 끌려가서 소대장, 중대장 훈련을 받고서야 다시 정치지도원의 임무를 수행할 수 있게 됐다. 추가로 군에 대한 정치적 우려를 최소화하기 위해 장교들의 공산당 입당을 적극 장려했다.
 
== 중화인민공화국의 정치지도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