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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주에서 보병과 기병 1만여 명을 보내 서악현을 쳤다.<ref name="s23"/> 건안 6년([[201년]])의 일이다.<ref name="kc">《구주춘추》</ref> 두습은 관민 중에서 수비를 맡은 50명을 불러모았고, 함께 저항하기로 서약하였다.<ref name="s23"/> 친척이 밖에 있어서 스스로 나가서 그들을 지키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그것을 허락했으나, 관민들이 모두 함께 목숨을 바치기로 하였다.<ref name="s23"/> 두습은 스스로 화살과 돌을 쥐고 지휘했으며, 관민들은 두습에게 감격하여 기꺼이 부림에 응했다.<ref name="s23"/> 두습은 분전하여 적군의 머리 수백여 급을 베었으나, 두습 군도 30여명이 죽고 나머지 18명도 모조리 상처입어, 결국 적에게 성을 내어주었다.<ref name="s23"/> 두습은 부상당한 관민들을 이끌고 포위를 뚫었는데, 거의 다 죽었으나, 배신한 자는 없었다고 한다.<ref name="s23"/>
 
사례교위 [[종요]]의 추거로 의랑참군사가 되었고, [[순욱]]이 또 두습을 천거하여, 조조에게서 승상군제주로 임명되었다.<ref name="s23"/> 조조가 위공이 되는 데에 여러 신하들과 함께 노력하였으며,<ref name="ws-s01">왕침 등, 《위서》 (진수, 《삼국지》 권1 무제기에 배송지가 주석으로 인용)</ref> 건안 18년([[213년]]) 11월에 상서와 시중, 6경이 설치되면서<ref name="s01">진수, 《삼국지》 권1 무제기</ref> [[왕찬]], [[위기]], [[화흡]]과 함께 시중이 되었다.<ref name="wc">《위씨춘추》 (진수, 《삼국지》 권1 무제기에 주석으로 인용)</ref><ref name="s23"/> 조조는 비록 기억력이 뛰어나고 견문이 넓어 조조가 유람을 나갈 때마다 곁에서 함께 있는 일이 많았지만, 두습과 화흡을 더 존경했다.<ref name="s23"/>
사례교위 [[종요]]의 추거로 의랑참군사가 되었고, [[순욱]]이 또 두습을 천거하여, 조조에게서 승상군제주로 임명되었다.<ref name="s23"/>
 
건안 20년([[215년]]), 조조를 따라 한중의 [[장로 (후한)|장로]]를 쳤고, 돌아가는 조조에게서 부마도위를 배령받았고, 남아서 한중의 군무를 감독했다.<ref name="s23"/> 민중을 안정시키고 교도했기 때문에, 8만여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낙양과 업으로 이주했다.<ref name="s23"/> 건안 24년([[219년]]) 정월, 한중을 수비하던 [[하후연]]이 [[유비]]에게 져 죽임을 당하자, 탕구장군<ref name="s26">진수, 《삼국지》 권26 만전견곽전</ref> [[장합]], 정서장군사마<ref name="s26"/> [[곽회]]와 함께 군무를 행하면서, 장합으로 도독을 삼아 원수를 잃어 실색한 장병들을 안정시켰다.<ref name="s23"/> 조조가 결국 한중을 상실하고 동쪽으로 돌아가면서, 유부장사를 골라 뽑아 장안을 지키게 하려 했는데, 담당자가 천거한 사람이 부적당했으므로 조조가 친히 영을 내려 두습으로 유부장사를 삼고 관중에 주둔시켰다.<ref name="s23"/> 당시 관중의<ref name="zk">사마광, 《자치통감》 권68 한기 60</ref> 장군 허유(許攸)가 조조를 따르지 않고 불손하게 굴자, 조조가 분노하여 토벌하려 하고 간언을 듣지 않았다.<ref name="s23"/> 두습은 조조를 설득하여 허유를 토벌할 가치가 없다고 설득해 마침내 조조가 허유를 위무하여 귀순하게 하도록 했다.<ref name="s23"/>
 
[[연강]] 원년([[220년]]), [[조비]]가 위왕이 되자 관내후에 봉해졌다.<ref name="s23"/> 이해 조비가 황제가 되자, 독군량어사가 되었고 무평정후에 봉해졌으며, 다시 독군량집법이 되었고, 중앙으로 들어가 상서가 되었다.<ref name="s23"/>
 
[[태화 (위)|태화]] 원년([[227년]]), [[조예|명제]]가 즉위하자 평양향후에 봉해졌다.<ref name="s23"/> 태화 2년([[228년]]), 촉한의 [[제갈량]]이 침입해 오고 대장군 [[조진]]이 군사를 거느리고 막으러 가면서, 두습을 대장군군사로 삼았다.<ref name="s23"/> 태화 5년([[231년]])<ref name="s09">진수, 《삼국지》 권9 제하후조전</ref> 조진이 죽으면서 사마의가 후임이 되고서도 두습은 대장군군사에 임명되었다.<ref name="s23"/> 나중에 질병을 이유로 조정으로 돌아와 태중대부가 되었다.<ref name="s23"/> 죽은 후에는 소부로 추증되었고, 시호를 정후(定侯)라 하였으며, 아들 두회가 세습했다.<ref name="s23"/>
 
[[하후상]]이 태자 [[조비]]와 친근했는데, 두습은 하후상을 특별히 대할 이유가 없다고 조조에게 말했다.<ref name="s23"/> 조비는 이를 듣고 처음에는 심히 불쾌히 여겼으나, 나중에 자신이 하후상의 애첩을 죽인 후 하후상이 죽은 애첩을 잊지 못해 추태를 보이자 분노하여 두습이 말한 바를 추억했다.<ref name="s23"/><ref name="s09"/>
==친척 관계==
*두안 (증조부)
**두근 (조부)
***?
****두기 (아우)
****'''두습'''
*****두회 (아들)
****두기 (아우)
 
==《삼국지연의》의 두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