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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주 자사가 되기까지===
할아버지가 죽어 관직을 떠났다가, 사도에게 초빙되어 속관이 되고 의랑으로써 사례군사에 참가했다. 건안 16년([[211년]]), 조조가 [[마초]]를 치러 가다가 홍농을 지나면서, 가규에게 홍농태수를 대행하게 했다. 가규는 둔전도위가 도망친 백성을 숨기고 있다고 의심했는데, 둔전도위는 군에 속하지 않았으므로 언어가 불순했다. 가규는 분노하여 둔전도위에게 죄를 묻고 다리를 부러트렸다. 이 일로 인해 면직되었으나, 조조는 이를 좋게 여기고는 승상주부로 삼았다. 후에 간의대부가 되었고, [[하후상]]과 함께 군사 계책을 장관했다. 건안 25년([[220년]]), 조조가 죽자 조조의 장사를 주관했다. [[조창 (중국 삼국 시대조위)|조창]]이 장안에서 와 옥새가 어디 있는지를 묻자, 가규는 엄히 대답하여 조창을 물렸다. 마침내 조조의 관을 업으로 옮겼다. 이 해 6월, 조비가 대군을 일으키자 가규는 승상주부좨주를 맡았다.
 
[[조비|문제]]가 위왕이 되자, 업현에 불법이 많으므로 업현령이 되었고, 1달이 지나서 위군태수가 되었다. 문제는 초현에 이르자 가규를 예주자사로 임명했다. 당시 천하는 기강이 풀어져 있었는데, 가규는 법령을 엄중히 집행하지 않을 수 없다고 선언하고, 병조종사가 옛 자사에게 휴가를 얻어 가규가 임명된 지 여러 달 후에야 나타나자, 이를 기화로 2천 석 이하 관리들 중에서 방종하여 법을 따르지 않는 자들을 모조리 면직시켰다. 문제는 가규를 '진정한 자사'라고 찬탄하고, 천하에 포고하여 예주를 표준으로 삼았으며, 가규를 관내후에 봉했다. 예주는 오나라와 국경을 맞대고 있었는데, 가규는 척후를 밝히고 전쟁 준비에 힘써 적이 함부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한편, 제방을 새로 쌓고 소익양피란 저수지를 만들고 200리의 운하를 뚫었다. 이 운하는 나중에 '가후거'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