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렉산드르 케렌스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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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출신의 변호사였던 그는 정치범 변론으로 이름을 얻은 [[1905년]] [[사회주의혁명당]]에 가입해 정치 활동을 시작했고, [[1912년]] 제4차 [[두마]](제정 러시아의 의회)에 [[러시아노동당]] 소속으로 진출해 제도권 정계에 발을 들여놓았다.
 
===2월 혁명===
아직 [[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전선]]에서는 [[독일 제국의 군사|독일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던 [[1917년]] [[3월 15일]], 이른바 [[러시아 혁명|2월 혁명]] 니콜라이 2세가 퇴위했다. 혁명 직후 사회주의혁명당으로 복귀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을 맡으며 새 러시아의 권력 중심부로 들어갔다. 혁명의 결과로 러시아에 공화정 형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을 거쳐 7월에는 총리가 되었다.
{{본문|2월 혁명 (러시아)}}
아직 [[동부 전선 (제1차 세계 대전)|전선]]에서는 [[독일 제국의 군사|독일군]]과 치열한 혈투를 벌이던 [[1917년]] [[3월 15일]], 이른바 [[러시아 혁명|2월 혁명]] [[니콜라이 2세가2세]]가 퇴위했다. 혁명 직후 사회주의혁명당으로 복귀해 [[상트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부의장을 맡으며 새 러시아의 권력 중심부로 들어갔다. 혁명의 결과로 러시아에 공화정 형태의 임시정부가 수립되자 법무부 장관, 국방부 장관을 거쳐 7월에는 총리가 되었다.
 
정치 활동 초기부터 온건 사회주의자로 일관한 그는 법무부 장관이 되자마자 사형제를 폐지하고 언론 자유를 확대하고 보통선거제 도입을 꾀하는 등 민주주의 개혁에 박차를 가했다. 러시아의 전 역사를 통해 사형제가 없었던 시절은 그가 정부에 머물러 있던 7개월 남짓뿐이었다. 그러나 전선에서는 계속 사형제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전쟁에 지친 군인들과 일반 민중의 뜻을 거스르며 독일과의 강화에 반대했다. 러시아력으로 [[4월 18일에18일]]에 임시정부 외무장관 [[밀류코프]]가 혁명으로 러시아가 전선에서 이탈할 것을 우려하는 서방연합국에게 전쟁 지속을 밝힌 바 있는데, 케렌스키도 이 입장을 지지했다. 실제로 7월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육군|육군]]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리기도 했다. 점차 케렌스키가 주도하는 공화정에 대해 좌우 양측으로부터 위기가 닥쳐왔다.
 
먼저 9월에는 [[라브르 코로닐로프]] 장군이 우익독재 수립을 위한 쿠테타를 일으켰다. 전선의 군부대를 동원, 모스크바로 진격했지만, 정쟁을 중단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가 진압하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케렌스키는 이 음모에 연루되었다는 비난을 면치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