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스타브 1세 바사: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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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스타브 1세 바사'''(Gustav I Vasa, [[1496년]] [[5월 12일]] ~ [[1560년]] [[9월 29일]], 재위 [[1523년]] [[6월 6일]] ~ [[1560년]] [[9월 29일]]) 또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Gustav I Eriksson Vasa)은 [[스웨덴]] [[바사 왕조]]의 시조이다.
 
[[웁살라 대학교|웁살라 대학]]에서 배우고, [[1518년]] [[덴마크]][[덴마크의 군주|왕]] [[크리스티안 2세]]와의 전쟁에 참가, 덴마크의 포로가 되었으나, [[1519년]] 도피하여 [[달레카를리아]](Dalecarlia)에 귀환했다. [[1520년]] [[11월]] 덴마크는 스웨덴 귀족들을 대규모로 학살하였다. 이 '[[스톡홀름 피바다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구스타브는 저항운둥에 앞장섰고, 힘든 투쟁 끝에<ref>《월드인포:예술을 꽃피운 유럽 5 - 스웨덴 편》/교원/41쪽 </ref> 덴마크인들을 몰아내고 [[1523년]] [[6월 6일]], 구스타브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로 스웨덴 왕이 됨과 동시에 독립을 선언했고, 마침내 [[칼마르 동맹]]이 해체되었다. 그는 국교를 [[루터교]]로 정하고, 전체 교회 재산을 몰수(1527년)하여, 국가 재정을 늘렸다.
 
그는 국교를 [[루터교]]로 정하고, 전체 교회 재산을 몰수(1527년)하여, 국가 재정을 늘렸다. 또한 [[그립스홀름 성]] 등을 짓고, 개혁을 잘 이끌어 훗날 스웨덴이 [[발트 해]]의 강대국으로 발전하는 기틀을 만들었다. 구스타브는 [[1560년]] [[9월 29일]] 사망했고, [[웁살라 대성당]]에 묻혔다.
 
[[1560년]] [[9월 29일]] 사망하여 [[웁살라 대성당]]에 묻혔다.
 
[[파일:Uppsala domkyrka tomb Gustav Vasa01.jpg|thumb|left|[[웁살라 대성당]]에 있는 구스타브 1세 에릭손 바사의 석관<ref>석관 안에 유해가 있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