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각 (후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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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제(少帝)의 황후 당희(唐姬)는 소제가 [[이유 (후한)|이유]](李儒)에게 살해당한 후 고향인 영천으로 돌아가던 중 영천으로 쳐들어온 이각에게 잡혔고, 이각이 아내가 될 것을 권하자 이를 거절하여 이각에게 죽임을 당하였다.
 
또한, 영천의 [[순욱 (후한)|순욱]](荀彧)은 이각의 침략을 두려워하여 하루속히 피난을 갈 것을 장로들에게 부탁하였다. 장로들이 응하지 않아서, 순욱은 자신의 일족들만을 데리고 기주(冀州)로 피난을 갔다. 결국 영천은 이각의 공격을 받아 주민 대부분이 죽임을 당하였다.
 
=== 왕윤의 반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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흥평(興平) 원년([[194년]]), 정서장군(征西將軍) [[마등]](馬騰)이 이각과 관계를 맺으려 하자 이각은 이를 거절하여 관계가 도리어 악화되었다. 마등이 쌍방의 중재에 들어간 [[한수 (후한)|한수]](韓遂)와 공모하여 장안을 공격하자 이를 물리쳤고, 마등에 호응하여 익주에서 쳐들어온 [[유언 (후한)|유언]](劉焉)의 군세도 물리쳤다. 이각을 암살하려 한 [[유범]](劉範)은 도망을 가던 중 살해당하였고, 차남 [[유탄 (후한)|유탄]](劉誕)은 처형당하였다.
 
이각은 마등 등과 싸우는 한편, 동쪽에서 세력을 키우고 있던 [[원소 (삼국지후한)|원소]](袁紹)와 [[조조]](曹操)에 위기를 느껴 그들과 대립 관계에 있던 [[원술]](袁術) · [[공손찬]](公孫瓚) · [[도겸]](陶謙) 등에게 [[헌제]](獻帝)의 이름으로 작위를 수여하여 연대를 도모하였다.
 
이각과 곽사는 성내를 분할하여 통치하였으나 통치력은 전무하다고 말해도 좋을 정도였고, 도적을 잡기는커녕 부하들이 맘대로 하도록 내버려 두어 부하들이 백성들에게 난폭하게 굴었다. 그 때문에 식량 가격이 급등하였고, 부모 자식이 서로 잡아먹었으며 백골과 썩은 시체가 길거리에 가득하였고 곳곳마다 악취가 만연하였다. 또한 동료 [[번조]](樊稠)를 마등과의 전투에서 생포한 한수를 놓아주었다는 이유로 죽여 서량(西凉 : 양주[凉州])에 대항할 수 있는 인재를 잃고 세력이 약화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