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수 (서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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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중국이 셋으로 분열된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에 태어난 그는 일찍이 [[촉한]]의 관리를 지냈고, [[초주]](譙周)의 문하에 있었다. 진수가 출사한 후, 촉나라에서 관각영사(觀閣令史)라는 벼슬을 지냈지만, 환관 [[황호]](黃皓)에게 핍박을 받아 벼슬에서 쫓겨나기도 했었다. 그가 31살이 되었을 때 [[촉한]]은 [[위 (삼국 시대)|위나라]]에게 망했다. [[진 (위진남북조)|진나라]]의 [[사마염]](司馬炎)이 천하를 통일하고난 이후, 진수의 재능을 알아챈 사공 [[장화 (서진)|장화]](張華)의 추천을 받아 진나라의 관리가 되었다. 좌저작랑(佐著作郞)·양평령(陽平令)을 역임했고, 저작랑·파서군중정(巴西郡中正)으로 전임했다.
 
진수는 [[삼국 시대 (중국)|삼국 시대]]의 저작들을 모아 《[[삼국지]]》를 편찬했다. 그는 [[위 (삼국 시대)|위나라]]로부터 선양을 받은 [[진 (위진남북조위진)|진나라]]의 신하였기에 [[위 (삼국 시대)|위나라]]를 정통으로 [[삼국지]]를 기술했다. 위나라와 오나라와는 달리 [[촉한|촉나라]]에는 엄밀한 의미의 사관은 없었지만, 진수는 촉나라의 관리였기 때문에 촉나라 기술의 부족함을 덜 수 있었다.
 
진나라의 [[장화 (서진)|장화]]는 진수의 뛰어난 안목과 탁월한 재능을 칭찬하고 황제에게 추천하려 했다. 그러나 장화의 정적이었던 [[순욱 (공증서진)|순욱]](荀勗)의 훼방으로 진수는 장광 태수로 전임됐다. 이후 진나라의 황제는 진수의 재능을 인정하고 치서시어사(治書侍御史)에 임명했다. 이후 모친이 별세하자 진수는 관직을 버렸다. [[낙양]]에 시신을 묻으라는 모친의 유언을 따랐으나, 고향에 묻어야 한다는 예를 어겼다는 이유로 향당의 비난을 받았다.
 
진수는 삼국지 외에도 《고국지(古國志)》50편, 《익도기구전(益都耆舊傳)》, 《관사론(官司論)》, 《석위(釋위)》, 《광국론(廣國論)》, 《촉상제갈량집(蜀相諸葛亮集)》을 편찬해 [[중국]] 사학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