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고뉴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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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고뉴 전쟁'''은 [[부르고뉴 공국|부르고뉴 공작]](Dukes of Burgundy)과 [[발루아 왕가|프랑스 왕]]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전쟁으로 이후 [[스위스 연방]]도 참여하여 이 전쟁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해내었다.

[[1474년]] 개전해 몇 년의 시간이 흐른 뒤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Charles the Bold)은 1477년 [[낭시 전투]](Battle of Nancy)에서 크게 패하고 전장에서 전사했다. [[부르고뉴 공국]]과 기타 부르고뉴 영지는 [[프랑스]]에 병합되었으나, [[부르고뉴령 네덜란드]](Burgundian Netherlands)와 [[프랑슈콩테]]( Franche Comté)는 샤를의 딸 [[부르고뉴의 마리]](Mary of Burgundy)가 상속받고, 그녀가 [[신성로마제국의 막시밀리안 1세]](Maximilian I, Holy Roman Emperor)와 결혼한 뒤 사망했기 때문에 최종적으로 [[합스부르크 가]](House of Habsburg)의 영지가 되었다.
 
==시대배경==
[[Image:Karte Haus Burgund 4 EN.png|thumb|left|200px|용담공 샤를의 치세 기간 발루아-부르고뉴 왕가의 영토]]
 
[[발루아 왕가#부르고뉴의 공작|부르고뉴 공작]]들은 [[신성로마제국]]과 [[프랑스 왕국]]이 지배를 확립할 때까지 약 100년 이상에 걸쳐 영화를 지속했다. 공국은 본거지인 [[프랑슈콩테]]와 [[부르고뉴 공국]]의 기타 [[플랑드르]](Flanders) 및 [[브라반트]](Brabant), [[룩셈부르크]](Luxembourg)란 경제력이 풍부한 지역을 소유하고 있었다.

일반적으로 부르고뉴 공작들은 확장정책을 채택해 특히 [[알자스]](Alsace)와 [[로렌]](Lorraine)의 획득에 적극적이어서 지리적으로 남북으로 떨어진 영지를 하나로 합치는 것이 목표였다.목표였는데 [[백년전쟁]]에서 부르고뉴 공작은 [[잉글랜드]]측에 참가해 프랑스 왕과는 이미 대립하였다.

샤를의 라인 강으로 진출은 합스부르크 가문 특히 신성로마제국 [[프리드리히 3세 (신성 로마 제국)|프리드리히 3세]]와의 다툼의 원인이 되었다.
 
==대립==
[[Image:Charles the Bold 1460.jpg|thumb|200px|[[용담공 샤를]], 당대의 초상화, [[로히르 반 데르 웨이덴]]의 작품]]
 
[[1469년]] 처음엔 [[오스트리아 대공 지그문트|합스부르크의 지그문트]](Sigismund of Habsburg) 공작은 [[부르고뉴 공작]] [[용담공 샤를]]과 함께 [[Eidgenossen]](혹은 [[스위스 연방]])의 확대를 막기 위해 [[알자스]]에 있던 자신의 영지를 담보로 부르고뉴 공작에게 양도했다. 그러나 샤를의 [[라인 강]] 서쪽과의 관계는 지그문트가 바라던 스위스를 공격하는 동기가 되지 못했다. 샤를은 [[바젤]](Basel) 및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뮐루즈]](Mulhouse) 등의 도시에 대항해 통상 금지령(embargo)를 지방 행정관(reeve) [[페터 폰 헤겐바흐]](Peter von Hagenbach)에게 실행하게 했다. 헤겐바흐는 압정을 펼쳤기 때문에 부르고뉴에 대해 도시 주민의 반감은 강해지게 되었고, 도시는 [[베른]](Berne)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를의 확장 전략은 1473년~1474년에 걸쳐 이루어진 [[쾰른의 대주교]](Archbishopric of Cologne)에 대한 공격, [[노이스 공성전]](Siege of Neuss)의 실패로 처음으로 좌절되었다.
 
그러나 샤를의 [[라인 강]] 서쪽과의 관계는 지그문트가 바라던 스위스를 공격하는 동기가 되지 못했다. 샤를은 [[바젤]](Basel) 및 [[스트라스부르]](Strasbourg), [[뮐루즈]](Mulhouse) 등의 도시에 대항해 통상 금지령(embargo)를 지방 행정관(reeve) [[페터 폰 헤겐바흐]](Peter von Hagenbach)에게 실행하게 했다.
1474년 지기문트는 스위스와 화평을 획책하고, [[콘스탄츠]](Konstanz)에서 후에 "영구협정"(Ewige Richtung)이라고 부르는 협정을 맺었다. 또 한편 지그문트는 샤를에게 양도한 영지를 도로 구입하려 했으나 이것은 거절당했다. 같은 해 4월 30일 알자스에서 반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힌 헤겐바흐가 참수형에 처해졌다. 알자스 및 스위스의 도시와 지그문트는 결속하여 "대부르고뉴 동맹"을 맺고, 같은해 11월 13일 [[에리쿠르 전투]]( Battle of Héricourt)에서 승리해 [[프랑슈콩테]]의 쥐라(Jura)를 정복했다. 다음 해 1475년 베른군이 샤를과 동맹관계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Duchy of Savoy)의 [[보 주|보]](Vaud) 지방을 정복해 파괴했다. [[발레 주|발레]](Valais)에서는 1475년 11월 [[플란타 전투]](Battle on the Planta)에서 독립공화국 ''지벤 젠덴''(Sieben Zenden)이 베른군 및 기타 동맹국의 도움에 의해 사보이아인을 저지 발레(lower Valais)에서 몰아냈다. 1476년 3월 샤를은 보복을 위해 사보이아의 피에르 드 로몽(Pierre de Romont)의 영지 [[그랑송]](Grandson)으로 진군했다. 이곳은 같은해 1월 부르고뉴 군이 공략할 때 항복한 스위스 병사를 본보기를 위해 교수형에 처하고, 호수에 익사시켰던 인연이 있는 땅이었다. 스위스 동맹군이 수일 후 이곳에 도착했고, [[그랑송 전투]](Battle of Grandson)에서 샤를은 뼈아픈 패배를 겪었다. 그는 전장에서 물러날 여유를 얻지 못해, 대포 및 많은 식량, 보물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으나 샤를은 다시 [[모라 전투]](Battle of Morat)에서 스위스 군에게 패배했다. 1477년 샤를은 [[낭시 전투]]에서 [[로렌의 군주|로렌 공작]] [[로렌 공작 르네 2세|르네 2세]](René II, Duke of Lorraine)가 이끄는 로렌 군과 그를 따르는 스위스 병사와 교전하다 전사했다.
 
헤겐바흐는 압정을 펼쳤기 때문에 부르고뉴에 대해 도시 주민의 반감은 강해지게 되었고, 도시는 [[베른]](Berne)에게 구원을 요청했다. 샤를의 확장 전략은 1473년~1474년에 걸쳐 이루어진 [[쾰른의 대주교]](Archbishopric of Cologne)에 대한 공격, [[노이스 공성전]](Siege of Neuss)의 실패로 처음으로 좌절되었다.
 
1474년 지기문트는 스위스와 화평을 획책하고, [[콘스탄츠]](Konstanz)에서 후에 "영구협정"(Ewige Richtung)이라고 부르는 협정을 맺었다. 또 한편 지그문트는 샤를에게 양도한 영지를 도로 구입하려 했으나 이것은 거절당했다. 같은 해 4월 30일 알자스에서 반 부르고뉴파에게 사로잡힌 헤겐바흐가 참수형에 처해졌다.
 
알자스 및 스위스의 도시와 지그문트는 결속하여 "대부르고뉴 동맹"을 맺고, 같은해 [[11월 13일]] [[에리쿠르 전투]]( Battle of Héricourt)에서 승리해 [[프랑슈콩테]]의 쥐라(Jura)를 정복했다. 다음 해 [[1475년]] 베른군이 샤를과 동맹관계에 있던 [[사보이아 공국]](Duchy of Savoy)의 [[보 주|보]](Vaud) 지방을 정복해 파괴했다.
 
[[발레 주|발레]](Valais)에서는 [[1475년]] 11월 [[플란타 전투]](Battle on the Planta)에서 독립공화국 ''지벤 젠덴''(Sieben Zenden)이 베른군 및 기타 동맹국의 도움에 의해 사보이아인을 저지 발레(lower Valais)에서 몰아냈다.
 
[[1476년]] 3월 샤를은 보복을 위해 사보이아의 [[피에르 드 로몽]](Pierre de Romont)의 영지 [[그랑송]](Grandson)으로 진군했다. 이곳은 같은해 1월 부르고뉴 군이 공략할 때 항복한 스위스 병사를 본보기를 위해 교수형에 처하고, 호수에 익사시켰던 인연이 있는 땅이었다.
 
스위스 동맹군이 수일 후 이곳에 도착했고, [[그랑송 전투]](Battle of Grandson)에서 샤를은 뼈아픈 패배를 겪었다. 그는 전장에서 물러날 여유를 얻지 못해, 대포 및 많은 식량, 보물을 남기고 철수하였다. 새로운 군대를 편성하였으나 샤를은 다시 [[모라 전투]](Battle of Morat)에서 스위스 군에게 패배했다.
 
[[1477년]] 샤를은 [[낭시 전투]]에서 [[로렌의 군주|로렌 공작]] [[로렌 공작 르네 2세|르네 2세]](René II, Duke of Lorraine)가 이끄는 로렌 군과 그를 따르는 스위스 병사와 교전하다 전사했다.
 
==전쟁의 영향==
샤를의 죽음으로 부르고뉴 공작 가문(발루아-부르고뉴 가)의 남자는 맥이 끊겼다. 부르고뉴 공국의 영토인 [[플랑드르]]는 [[막시밀리안 1세 (신성 로마 제국)|오스트리아의 대공 막시밀리안]]이 훗날 [[신성 로마 제국 황제]]가 되고, 샤를의 딸 [[부르고뉴의 마리|마리]]와 결혼함으로써 마리의 사후 합스부르크 가문 영지가 되었다.

부르고뉴 공작령은 [[루이 11세]](Louis XI)가 다스리는 [[프랑스]]에 귀속되었다.귀속되었고 프랑슈콩테도 프랑스에 병합되었으나 [[1493년]] [[생리스 조약]](treaty of Senlis)에 의해 프랑스 왕 [[샤를 8세]](Charles VIII)로부터 막시밀리안 1세의 아들 [[펠리페 1세|단려공 필리프]]에게 양도되었다. 이것은 샤를 8세의 [[이탈리아]] 침략 때 막시밀리안 1세에게 중립의 입장을 지키게 하기 위한 매수공작이었다.
 
또한 당시 유럽 최강이라고 널리 알려졌던 부르고뉴 군에게 승리한 것에서 스위스는 거의 무적이라는 명성을 얻었다. 부르고뉴 전쟁은 유럽의 전장에서 [[스위스 용병]]의 평가를 특출 나게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