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비 (조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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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안 23년([[218년]]), [[마초 (촉한)|마초]](馬超)와 [[장비]](張飛)의 침입에 대응하여 하변에 파견되는 [[조홍 (조위)|조홍]](曹洪)을 [[조휴]](曹休)와 함께 참군(參軍)으로서 따라갔다.<ref name="s25"/> 조조가 한중(漢中)에서 철수한 후에 승상장사(丞相長史)가 되었다.<ref name="s25"/>
 
[[황초]](黃初) 원년([[220년]]), [[조비]](曹丕)가 황제에 오른 후 신비는 시중(侍中)으로 승진하고 관내후(關內侯)에 봉해졌다.<ref name="s25"/> 당시 정월 개정 논쟁에서 위나라를 고대 [[순임금|순]](舜)과 [[우임금|우]](禹)의 계통으로 보고, [[하나라|하]](夏)의 정월로 위나라의 정월을 삼자고 주장했으며, 황제는 이를 수용했다.<ref name="s25"/> 황초 연간에 조비가 하북의 주민 10만 호<ref>[[경원 (위)|경원]](景元) 원년([[260년]])의 조위의 호구수가 약 66만이므로, 이는 조위 전체 호구의 1/7을 넘어서는 규모였다.</ref> 를 하남으로 옮기는 강제 이주안을 발표하였는데, 당시 메뚜기 때문에 백성들이 굶주리고 있었으므로 반대 의견이 많았으나, 조비가 간언을 불허하겠다는 기색을 보이자 다른 신하들이 간언하지 않은 것과 달리 신비는 정식으로 끈질기게 간언하였고, 결국 이주민을 반으로 줄였다.<ref name="s25"/> 조비가 사냥을 좋아하는 것에도, 아랫사람들에게 고통을 준다며 간언했고, 조비는 사냥 나가는 횟수를 줄였다.<ref name="s25"/>
 
황초 3년([[222년]]), 상군대장군(上軍大將軍) [[조진]](曹眞)의 군사로서 [[주연 (오)|주연]](朱然)이 지키는 강릉성을 치는 싸움에 따라갔고, 돌아와서는 광평정후(廣平亭侯)가 되었다.<ref name="s25"/> 조비가 오나라를 정벌하려 하자 신비는 반대하였고, 조비는 듣지 않았으나 원정은 실패했다.<ref name="s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