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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l|군인 정보}} 적용
{{군인 정보
[[그림:FritzWitt.jpg|thumb|1940년 9월 SS소령 시절의 프리츠 비트]]
|이름=프리츠 비트<br>Fritz Witt
 
|생애=[[1908년]] [[5월 27일]] - [[1944년]] [[6월 14일]]
|그림=FritzWitt.jpg
|별명=
|태어난 곳=
|죽은 곳=
[[그림:FritzWitt.jpg|thumb|설명=1940년 9월 SS소령 시절의 프리츠 비트]]
|충성=[[나치 독일]]
|복무 기간= [[1933년]] ~ [[1944년]]
|최종 계급=[[SS소장]]
|부대=[[베를린 경호대]]<br>[[SS슈탄다르테 도이칠란트]]
|지휘=[[1 SS기갑사단 LSSAH]]<br>[[12 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
|주요 참전 전투/전쟁=
|서훈 내역=
|기타 이력=
|}}
'''프리츠 비트'''(Fritz Witt, [[1908년]] [[5월 27일]] - [[1944년]] [[6월 14일]])는 [[1 SS기갑사단 LSSAH |1 SS기갑척탄병 사단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사단]] 출신으로 [[12 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의 사단장을 지낸 [[무장친위대]] 장교이다. 1944년 연합군의 함포사격으로 사망했다.
 
== 대전 이전 SS로서의 활동 ==
 
[[1908년]] [[5월 27일]] [[하겐]](Hagen)시 [[호헨림부르크]](Hohenlimburg)에서 태어났다. [[중산층]]이었던 아버지는 직물 판매업자였다. 학교를 졸업한 후 가업을 이어 1925년부터 1931년까지 직물 판매업에 종사했다. 이 시기, [[히틀러]]와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NSDAP)의 출현을 목격하고 열렬한 지지자가 되었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혼란과 빈곤을 구제해 줄 대안으로 나치를 보았던 것이다. 1931년 12월 1일, 민족사회주의 독일 노동자당(당원번호 816,769) 및 SS(SS번호 21,518)에 가입했다. [[1933년]] [[3월 17일]], 117명만으로 구성된 정예 경비대인 [[SS 베를린 경호대]](SS-Stabswache Berlin)에 배속되었다. 1933년 10월 1일에는 SS소위에 임명되었다.
 
[[1934년]] [[5월 9일]], SS중위로 승진했고 얼마 후 [[SS전투부대]]에 속한 4개의 슈탄다르테 중 하나인 [[펠릭스 슈타이너]](Felix Steiner) SS대령의 [[SS슈탄다르테 도이칠란트]] 3중대 중대장이 되었다. 나머지 슈탄다르테는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 [[SS슈탄다르테 게르마니아]] 그리고 [[SS슈탄다르테 데어 퓌러]]였다. 1938년 10월, SS전투부대는 육군 지휘 아래 앞으로 있을 전투에전쟁에 관한대비한 준비를 하게 되었다.
 
도이칠란트 SS연대 3중대장으로 복무하던 시절에는 [[오스트리아 병합]] 당시 이루어진 시가 행진에 참여했다. 이후, 차량화가 이루어진 동부대는 도이칠란트 연대는 [[주데텐란트]](Sudetenland) 점령에도 참가했다. 비트는 1939년 3월,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무혈 합병에도 참가했다. 히틀러로부터 총 3개의 SS-VT 슈탄다르테로 SS전투사단(SS-Verfuegungs Division)을 편성하라는 명령이 떨어졌다(라이프슈탄다르테 즉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는 독자적으로 사단을 편성했다). [[폴란드]]에서 벌어질 중대 국면에 따라 이 계획은 잠시 유보되었고, [[백색 작전]](Fall Weiss)라 명명된 공세를 위해 투입 태세를 취하게 되었다. 비트의 도이칠란트 연대는 동프러시아를 거점으로 한 혼성 기갑부대인 켐프 소속이 되었다.
[[1943년]] 2월, SS는 [[1926년]]에 출생한 [[히틀러 청소년단]] 단원을 주축으로 신규 무장SS사단을 편성하기 시작했다. 사단의 명칭과 단대호는 [[12 SS기갑사단 히틀러유겐트]]였다. 이 신규 사단에 필요한 간부들을 확보하기 위해 라이프슈탄다르테의 고참 사관 및 부사관 다수가 전속되었다. 비트를 포함해 [[막스 뷘셰]], [[쿠르트 마이어]], [[게르트 브레머]], [[빌헬름 몽케]], [[후고 크라스]] 그리고 [[룬돌프 폰 리벤트로프]]가 함께 전속되었다. [[1943년]] [[7월 1일]], 비트는 SS상급대령으로 승진했고 그 달 말 정식으로 히틀러유겐트의 지휘권을 인수했다. [[벨기에]] [[베베를로]](Beverloo)에서 사단 지휘권을 인수한 비트는 신규 SS기갑사단의 전투 준비와 훈련의 감독이라는 대사업을 시작하게 되었다. 비트는 수많은 규칙과 규정을 어겨가면서까지 최대한 빨리 전투 준비를 끝마칠려고 했다. 대신 현실적인 전투 시나리오와 실탄사용도 불사하는 훈련이 주가 되었다. 그 결과 히틀러유겐트의 사기는 비할 데 없이 높아졌고, 신뢰와 존경을 바탕으로 한 간부와 병사들의 관계는 더 없이 끈끈해졌다.
 
1944년 1월, 비트의 부대에서 큰 스캔들이 발생했다. 같은 달 초, [[에리히 올뵈스터]] SS소령의 12 SS기갑수색대대 소속 빌리프레트 무어 SS소위가 만취 상태로 한 벨기에인 부부를 권총으로 협박한 채 그들이 보는 앞에서 15세의 딸 아이를 강간했던 것이다. 빌리프레트 무어는 [[슈투트가르트]](Stuttgart)의 [[나치당 지부장]](Gauleiter)인 [[빌헬름 무어의무어]]의 아들이었다. 올뵈스터는 이 사건 소식을 듣고 사단 법무관인 [[에버하르트 덴첼]] 박사(SS소령)과 함께 사적으로 무어를 방문했고 가족에게 끼칠 불미스러운 영향을 빌미로 권총 자살을 강요했다. 올뵈스터와 덴첼이 떠나자마자 무어는 자살했다. 전말을 듣고 분노한 무어의 아버지는 [[마르틴 보어만]]에게 진상 조사를 요구했다.
 
진상조사 결과, 올뵈스터는 강등되어 26 SS기갑연대 3대대장으로 좌천되었다. 대신 게르트 브레머 SS대위가 12 SS기갑수색대대 대대장이 되었다. 덴첼 박사는 SS이등병으로 강등되어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 예하 제 6 SS기갑척탄병 연대로 전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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