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루실로프 공세: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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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 = {{국기나라|러시아}}
|교전국2 = {{국기나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br />{{국기나라|독일 제국}}
|지휘관1 = {{국기그림|러시아}} [[
|지휘관2 = {{국기그림|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콘라트 폰 회첸도르프]]<br />{{국기그림|독일 제국}} [[알렉산더 폰 루덴도르프]]
|병력1 = 633,000명
|사상자2 = 1,500,000명 오스트리아 군 사상 <br> 350,000명 독일군 사상
}}
'''브루실로프 공세'''(Брусиловский прорыв)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
== 전투 배경 ==
이탈리아 왕은 [[트렌티노]] 방면을 강압하고 있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을 흡수하기 위하여 동부전선에서 공세를 취하여 줄 것을 러시아
이에
한편 브루실로프 전면의 독일군은 대부분이 서부전선으로 이동하였고, 중포의 대부분과 강력한 수 개의 오스트리아 사단은 이탈리아 전선으로 차출되어 당시에는 [[
== 경과 ==
[[Image:Defenders NGM-v31-p369-A.jpg|thumb|300px|진군하는 러시아군]]
[[6월 4일]] 단시간의 기습적인 준비포격 후 브루실로프의 보병이 일제공격을 시작하였을 때 오스트리아군의 방어선은 무너지기 시작하였다. 브루실로프군의 우익
6월말에 이르러 브루실로프군은 우익에서 교통중심지 [[코벨]]과, 좌익에서 [[카르파티아 통로]]를 위협하고,
그러나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 장군은 용기와 자신을 가지고 모든 가용병력을 집결시키고 서부전선으로부터
동맹군은 서부전선에서
그동안 러시아군은 350,000명 이상의 포로와 많은 물자, 그리고 광대한 영토를 획득하였지만 러시아군 자체의 손실이 1,000,000명을 넘어 그 전투력은 약화되었고, 사기가 저하되었다.
한편 브루실로프 공세로 인해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에 대한 공격을 중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막대한 병력을 잃어 독일의 지원 없이는 이 이상의 작전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고 독일도 베르됭 지역에서
{{제1차 세계 대전}}
[[분류:제1차 세계 대전의 전투]]
[[분류:러시아의 전투]]
[[분류:독일의 전투]]
[[분류:오스트리아의 전투]]
[[ca:Ofensiva Brusílov]]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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