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르키아누스: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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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 정보|이름=마르키아누스 <br />Flavius Marcianus
|그림=Solidus Marcian RIC 0509.jpg
|재위=[[450년]] - [[457년]]
|황후=[[풀케리아]]
|이전 황제=[[테오도시우스 2세]]
|다음 황제=[[레오 1세 (비잔티움 제국)|레오 1세]]
|목록=[[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황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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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키아누스는 당시 동로마 사회의 고질적인 문제인 [[이단]] 논쟁에 휩싸였다. 그리스도 [[단성론]]을 둘러싸고 [[성부]]와 [[성자]]의 관계에 대한 논란으로 사회가 어수선해지자 마르키아누스는 [[451년]] 10월 [[칼케돈 공의회]]를 열고 논란을 종식시키려고 하였다. 칼케돈 공의회에서는 비록 단성론을 이단으로 규정했지만 [[시리아]]나 [[이집트]]의 [[주교]]들은 그 결정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그리스도]]의 단일한 본성을 계속 주장하여 향후 비잔티움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457년]] 마르키아누스는 병으로 세상을 떠났는데 독신을 맹세한 황후 풀케리아와의 사이에선 당연히 후계자가 없었으므로 당시 궁정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던 아스파르는 [[레오 1세 (비잔티움 제국)|레오 1세]]를 후계자로 지정했다. 마르키아누스의 치세는 비록 7년 동안의 짧은 치세였지만 혼란했던 서로마 제국과는 달리 평화기를 구가하였고 재정적으로 동로마 제국을 튼튼히 하였다. 마르키아누스는 사후 [[동방 정교회]]로부터 [[성인 (종교)|성인]]으로 추대되어 [[2월 17일]]을 그의 축일로 기념한다.
 
== 함께보기 ==
* [[비잔티움 제국]]
* [[비잔티움 황제 연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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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임후임
|전임자=[[테오도시우스 2세]]<br />(재위 408 - 450)
|후임자=[[레오 1세 (비잔티움 제국)|레오 1세]]<br />(재위 457 - 474)
|임기=[[450년]] - [[457년]]
|직책=[[비잔티움 황제 연대표|비잔티움 제국의 황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