레자 샤 팔라비: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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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 정보
[[그림:Rezashah.jpg|thumb|200px|레자 샤 팔라비]]
|이름 = 팔라비 1세
|그림 = Rezashah.jpg
|그림 크기 = 200px
|설명 =
|칭호 =
|본명 = 레자 샤 팔라비
|재위 = [[1925년]] ~ [[1941년]]
|대관식 =
|종교 =
|출생일 = [[1877년]] [[3월 16일]]
|출생지 =
|사망일 = [[1944년]] [[7월 26일]]
|사망지 =
|매장지 =
|배우자 =
|자녀 =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부친 = 압바스 알리 칸
|모친 =
|전임자 =
|후임자 = [[모하마드 레자 팔레비]]
|왕조 = [[팔라비 왕조]]
|서명 =
}}
 
'''레자 샤 팔라비'''({{llang|fa|‏رضا پهلوی‎}}, [[1877년]] [[3월 16일]] ~ [[1944년]] [[7월 26일]], 재위 1925: -[[1925년]] 1941~ [[1941년]])는 [[이란]] [[팔라비 왕조]]의 초대(初代) [[샤]](황제)이다.
 
== 생애 ==
=== 군인이 되기까지 ===
그는 1877년 어느 날, 팔레반 가(家)의 출신으로서, 그의 아버지인 압바스 알리 칸은 육군 [[대령]]이었다. 그는 어렸을 때 아버지를 여의어서 어머니가 그를 책임지게 되었다. 그의 가족들은 수도인 [[테헤란]]으로 이사를 갔고, 그의 어머니는 그를 교육을 시키는 일을 절대로 포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그는 훗날, 육군에 입대하여 러시아인 교관으로부터 많은 훈련을 받았다. 그는 사병 때부터 총명하고 재주도 좋아서 지휘관들도 부러워하였다. 그 덕분에 다른 사람들보다 먼저 장교가 되었다고 한다.
 
=== 국내의 정치 상황 ===
이 시기에 이란은 [[입헌 군주국]]이 되었으나, 1909년까지[[1909년]]까지 정치가 상당히 불안하여 노동자들은 가난하고, 빈민들은 굶어죽는 자가 생겨날 지경이었다.
 
페르시아는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어려운 경제력 때문에 전쟁에 참전할 생각이 없었다. [[오스만 제국]]은 경제력이 어려운데도 [[독일]]과 [[오스트리아-헝가리]] 주도의 동맹군에 참가하는 반면, 페르시아는 중립을 지켰던 것이다. 그러나 국경지대는 외국군간의 전쟁으로 피폐해졌으며, 흉작이 일어나 굶어죽는 자가 늘어났다. 게다가 1909년에[[1909년]]에 즉위한 아흐마드는 무능하고 병치레가 잦았다. 결국 [[1919년]] 페르시아는 영국과의 보호령 조약을 체결하였다.
 
=== 쿠데타 완료 ===
아흐마드 샤와 내각 총리 대신들은 나약하고 부패했으며, 민족주의자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이었다. 특히 영국과 러시아는 상업적·전략적으로 이 나라에 강한 이해관계를 갖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레자 칸은 혼란 상태를 종식시키고, 잘 훈련된 군사를 기반으로 권력을 이양받아 진보적인 정부를 세우려고 했다.
 
그는 몇몇 젊고 진보적인 요인들과 접촉해 [[1921년]] [[2월 21일]]에 1,200명의 군사를 이끌고 테헤란을 점령했다. 나이 젊은 [[사이드 지아 옷딘 타바타바이]]가 총리가 되었고, 레자 칸은 전쟁성 장관이 되었다.
 
=== 전쟁성 장관과 내각총리대신 ===
레자 칸은 이란 국가를 쇄신해 발전시키려 하였다. 그는 이상주의자와 공산주의자들을 강압적인 군대식으로 내쫓아버렸다. 정적에 대해서는 강력한 정치재능을 발휘해서 그들을 분열시키거나 약화시켰다. 그는 전쟁성(Minister of War) 장관으로 임명되었고, 국군의 통수권 또한 그가 행사하였다. 장관으로 재임하는 동안 줄곧 여러 총리들의 배후 실세로 존재하다가, 1923년에[[1923년]]에 자신이 내각총리대신으로 취임했다.
 
== 샤 ==
=== 즉위 이후 ===
아흐마드 샤는 유럽에서 오랫동안 병 치료를 받고 있었으며, 귀국을 거부하였다. 그 시기를 틈타 레자 칸은 [[공화국]](Republic)을 선포하려 하였으나 국민들은 레자 칸이 왕이 되기를 원했다. [[1925년]] 의회는 부재중인 국왕을 폐위시켰으며 제헌의회는 레자 칸을 샤로 선출하고 새로운 [[팔라비 왕조]]에 통치권을 부여했다.
 
[[1926년]] 4월 즉위한 뒤, 레자 칸은 내각총리대신 재임 당시 착수했던 개혁들을 자신의 뜻대로 계속 추진했다. 그는 국내의 분쟁을 야기시켜왔던 부족들을 무장해제시키고 일부는 정착시켜 그 힘을 약화시켰다. [[1928년]] 그는 열강들과의 불공평한 협정·조약들을 무효화하고 모든 특혜조치들을 폐지했다.
 
[[1927년]]부터 [[1938년]]까지 그는 이란 횡단철도를 건설하고, 주요도시들을 연결하는 지선을 만들기 시작했다(1927~38). 또한 [[1935년]] 궁정 여성들에게 [[차도르]]를 벗도록 명령했다(1935). 그리고 실질적으로 외국의 손에 들어 있던 국가의 재정과 통신을 장악했다. 그는 도로·학교·병원을 건설했고 최초로 [[1934년]] [[테헤란 대학교|대학교]]를 창설했다(1934). 그의 정책은 페르시아의 민주화와 외세의 간섭으로부터의 해방을 동시에 추구하는 데 의의가 있다.
 
그의 대외정책은 주로 [[소련]]과 [[영국]]을 맞붙게 하여 어부지리를 얻는 것이었는데, [[1941년]] 두 나라가 [[독일]]과 싸우기 위해 연합했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갔다. 이란을 통해 [[붉은 군대|소련군]]에 군수물자를 수송할 목적으로 1941년 8월 두 연합국은 함께 페르시아를 점령했다.
 
그는 [[나치 독일]]에 접근하였으나, 연합국에 의해 압력을 받아 [[1941년]]에 퇴위하였으며, [[1944년]] [[남아프리카 공화국]] [[요하네스버그]]에서 사망했다. 장남인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에 의해 왕위가 계승되었다.
 
== 국호 변경 ==
1930년대부터[[1930년]]대부터 민족주의자들과 반공(反共)주의자들은 아리아 민족과 이슬람교의 합성어인 Iran(이란)으로 부르자고 했다. 레자 샤는 1935년부터[[1935년]]부터 '페르시아' 대신에 지금의 '이란'으로 국호를 고쳤다.
 
{{전임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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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기=[[1925년]] - [[1941년]]
}}
 
[[분류:1877년 태어남]]
[[분류:1944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