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대중: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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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관 = [[김해 김씨|김해]]
|종교 = [[천주교]], 세례명 토마스 모어(Thomas More)
|배우자 = [[차용애]] (사별), [[이희호]]
|자녀 = 딸 김소희, 장남 [[김홍일 (1948년)|김홍일]], 차남 [[김홍업]], 삼남 [[김홍걸 (1963년)|김홍걸]]
|부모 = 김운식, 장수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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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년]] 3월 목포상업고등학교를 졸업한 김대중은 일제의 강제 징집을 피하기 위해 일본인이 운영하던 목포상선회사에 입사한다. 이듬해인 [[1945년]] 해방이 되자 김대중은 다니던 회사에서 종업원 대표로 추대되고, 종업원단체가 조직한 회사 경영위원회 위원장에 선출되었다. 정치에 관심이 많았던 그는 이 해 [[여운형]]이 이끄는 [[건국준비위원회]] 목포지부에 참여하여 선전부원으로 활동하게 된다.
 
김대중은 건준 목포지부에 이어 9월 경에 결성된 [[목포청년동맹]]에도 가입했지만, 건준에 관련된 일을 주로 했으므로 청년동맹에는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김대중은 이 해 하반기에 동생 김대의와 건준 명의의 벽보를 붙이다가 미 군정 경찰에 의해 포고령 위반이라는 이유로 체포되어 이틀간 구금되었다 석방된다. 같은 해에 차용애와[[차용애]]와 만나 결혼하였다. [[1946년]] 초에는 공산계열 정당인 [[조선신민당]] 목포시지부 조직부장이 되었다. 그러나 소련을 추종하는 세력과 갈등을 빚게 되면서 여름에 탈당하고 말았다.<ref>《경천애인》(김대중 저,2002년1월25일,맑은물)></ref><ref>[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8058 건준ㆍ신민당 참여, 좌익 발호에 발빼]</ref>
 
김대중은 이 무렵 회사의 관리문제로 서울에 올라가 군정청 운수부 해사국을 방문하여 회사관리권이 서울 거주 강 모씨에게 넘어간 것을 확인하고, 강씨를 만나 모든 선원을 그대로 고용하겠다는 안을 제시받았다. 회사로 돌아온 김대중은 이 방안을 놓고 사원들과 협의했으나 좌익동맹에 가입한 선원들이 반대하고 자치를 주장하면서 1946년 말 더 이상 회사 경영위원회에 관여하지 않고 회사를 떠난다. 1946년 9월 조선노동조합 전국평의회가 주도하는 전국 총파업이 단행되고, 10월 1일 대구를 중심으로 대규모 시민항쟁이 일어난다. 10월 31일에는 목포에서도 파출소 습격사건이 발생하는데, 김대중은 밀고자에 의해 이 사건의 배후 조종 혐의로 20일간 경찰서에 구속되었으나 무혐의로 석방되었다.<ref>[http://blog.ohmynews.com/kimsamwoong/288062 선박회사 운영하다 6ㆍ25전쟁 겪어]</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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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동생 : [[김대현 (1932년)|김대현]](金大賢, [[1932년]] ~ )
** 여동생 : ?
* 처 : [[차용애]](車蓉愛, [[1927년]] ~ [[1959년]])
** 장녀 : 김소희([[1946년]] ~ [[1947년]]) 2살 때 [[결핵]]으로 사망
** 장남 : [[김홍일 (1948년)|김홍일]](金弘一, [[1948년]]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