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기갑사단 (독일 국방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독일 1 기갑사단]]이 [[클로부크]](Kłobuck) 근처 폴란드군 방어선 돌파를 지원한 이후, 폴란드군은 후퇴했고, 3일 후에 4 기갑사단은 [[바르샤바]]로 진격을 계속했다. 사단은 [[9월 8일]]에 바르샤바에 도착했고, [[바르샤바 전투|기습 공격으로 도시를 점령을 꾀했다.]] 17시, 4기갑사단 예하 부대들은 바르샤바 서쪽 [[오코타]](Ochota)구에서 공격을 시도했다. 이 공격은 격퇴되었고, 4 기갑사단은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다음날, 사단은 포병대와 [[1 SS기갑사단 LSSAH|LSSAH]] [[자동차화 보병]] 연대를 배속받아 오코타와 [[볼라]](Wola)를 목표로 새로 공격을 시작했다. 폴란드군은 대전차포와 주요 도로에 설치된 바리케이트로 겨우 이 공격을 막아내었다. 폴란드군은 무기 부족 상태를 창의력으로 메꾸기도 했다. 시내 중심가를 향해 뻗은 도로 중에 하나에는 근처 공장에서 가져온 [[테레빈유]]가 뿌려졌다. 독일군 전차들이 접근하자, 테레빈유에 불을 붙였고, 전차는 불타버렸다. 독일군 전차대는 많은 피해를 입었고, 후퇴하지 않을 수 없었다. 4기갑사단만 해도 작전 가능한 220대 중에서 대략 80여대를 잃었다. 공격 실패 후, 4 기갑사단은 후방으로 물러나 [[브주라 전투|브주라(Bzura) 전투]]에 참가하여, 독일군의 반격을 지원했다. 폴란드 전역 종료 후, 사단은 재편성을 위해 [[라인 강]] 근처 [[니더라인]]으로 철수했다.
 
[[1940년]] [[프랑스 전투]] 동안 사단은 [[에리히 회프너]]의 16 기갑군단에 배속되어 참전했다. 16 기갑군단은 [[발터 폰 라이헤나우]] 원수의 [[독일 6 군|6 군]]의 [[파울 루드비히 에발트 폰 클라이스트|클라이스트]] 기갑집단 소속이었다. [[리에주]]와 [[샤를뢰]](Charleroi)를 거친 [[전격전]] 후, 사단은 [[Béthune]]로 이동, [[영국 원정군]]과 싸웠다. 이 전투가 [[덩케르크 전투]]다. 그렇지만, [[아돌프 히틀러]]가 기갑부대의 덩케르크 진격을 금지했고, 덩케르크에 포위된 영국군, 프랑스 1군, 벨기에군 일부는 영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다이나모 작전]]). 이것이 나중에 "덩케르크의 기적"'으로 알려진 사건이다. 덕분에 4 기갑사단은 덩케르크 해안으로 진격했을때는 포로와 영국군이 버리고 간 각종 중장비, 그밖에 쓰레기만 건졌다. 6월초, 4 기갑사단은 다시 최전선으로 이동하여 며칠 동안 프랑스의 거대한 영토를 진격했고, [[휴전]]이 발표되었을 때에는 거의 무저항으로 [[그로노블그르노블]]에 입성했다. 프랑스 점령군으로서 몇 달간 주둔한 후, 11월에 4사단은 다시 [[부르즈부르그]]로 철수하여 부대를 재편했다. [[독일 36 기갑연대|36 기갑연대]]가 새로 배속되었고, 103 포병연대가 3번째 포병대대로 증강되었다.
 
재편성 후, 사단은 [[동프로이센]]으로 이동하여 [[브레스트 (폴란드)|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폴란드 점령군 임무를 수행했고, [[레오 프라이헤어 가이에르 폰 슈베펜베르크]] 기갑대장의 [[독일 24 기갑군단]] 예하로 배치되었다. [[1941년]] [[6월 22일]], 사단은 독일의 [[소비에트 연방]] 침공작전인 [[바르바로사 작전]] 개시 단계에서 참전했다. 작전 첫날, 사단은 소련군 방어지점에 쐐기를 박아넣으려 노력했으며, 전선 후방 대략 65km [[코브린]]({{llang|be|Ко́брын, Ко́брынь}}, {{llang|pl|Kobryń}}, {{llang|ru|Ко́брин}})에 도달했다. 그런 다음, 사단은 [[민스크 전투]]에서 대규모 소련군을 격멸하기 위해 날카로운 창끝이 되어 공격에 나섰고, 이 전투로 독일군은 약 30만명의 소련군 포로를 획득했다. [[홈멜 전투]] 후 사단은 [[키에프]]로 진격하여 [[키에프 전투 (1941년)|키에프 전투]]를 치렀다.
9월, 사단은 [[모스크바]] 근처로 이동하여 [[모스크바 전투|모스크바 공략전]]을 준비하고 있던 [[독일 중부집단군|중부집단군]]에 배속되었다. [[1941년]] [[9월 30일]] 시작된 공격 후, 남서쪽 창은 소련의 수도를 포위하려고 함에 따라 4 기갑사단도 [[Mtsensk]]와 [[툴라]]까지 진격했다. 그런데, 가을비가 내려 툴라로 향하는 유일한 도로가 진흙탕으로 바뀌는 바람에 진격이 진격 속도가 둔화되어 정체되었다. 진흙수렁에 빠진 독일 전차대는 러시아 폭격기들의 쉬운 표적이 되었다. 11월 초 서리가 내리면서 독일군은 다시 도로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지만, [[동계 장비]]를 준비하지 않았다는 문제에 봉착했다.히틀러가 여름까지 신속한 승리를 열망했기 때문이다. 따뜻한 옷과 흰색 위장복이 부족했으며, 더 큰 문제는 전차와 다른 차량들이 빙점 이하로 온도가 떨어지면서 움직일 수 없게 되었다.
 
[[11월 5일]], 사단은 [[동부 유럽 전선 (제2차 세계 대전)#소련의 1941년 대반격|1941년 소련의 겨울 공세]]에 맞서 늘어진 방어선을 지키는 임무에 투입되었다. 격렬한 후퇴전에서 사단은 거의 모든 전차를 잃었고, 한달 후에 작전 가능한 전차는 25대에 불과했다. [[오렐]]로 후퇴한 4 기갑사사단은 소련의 반격을 저지했고, 일부 증원을 받았다. [[1942년]] 한해 동안, 4 기갑사단은 크고 작은 전투를 치르며 지냈다. 예하의 35 전차연대 1대대는 해산되어 남은 전차는 유일한 전차 대대에 넘겨졌다. 사단은 1943년 패배한 [[쿠르스크 전투]]에도 참가했고, 그 후 [[데스나 강]] 사이 지역으로 후퇴했다. 일련의 소련의 전술 공격 후, 전선은 마침내 [[바브뤼스크바브루이스크]]({{llang|be|Бабруйск, Babrujsk}}; {{llang|ru|Бобруйск, Bobruisk}})에 형성되었는데, 4 기갑사단은 이곳에서 [[1943년]] ~ [[1944년]]의 겨울을 보냈다.
 
1944년 봄, 사단은 점령된 폴란드의 [[코웰]] 지구로 이동하여, 예상되는 소련의 봄 공세 동안 심하게 두들겨 맞은 [[독일 남부 집단군]]을 지원했다. 그러나, [[1944년]] [[6월 22일]] 개시된 [[바그라치온 작전]]은 사실 [[독일 중부 집단군|중부 집단군]]이 주요 목표였고, 4 기갑사단은 후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카를 데커]] 장군의 [[독일 39 기갑군단|39 기갑군단]]으로 배속된 사단은 [[바르샤바]]로 후퇴하여, [[바르샤바 봉기]] 기간 중 소련군의 공세를 저지했다. [[볼로민 전투]](Wołomin )에서 4 기갑사단은 소련 3 장갑군단을 막고자 애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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