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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오나라 방면 사령관 ===
[[황초 (위)|황초]] 3년([[222년]]) [[조휴]], [[장료]]와 함께 오나라를 쳐, 오나라 대장 [[여범]]의 군대가 폭풍우에 휩쓸린 틈을 타 공격하여 격파했다. 이 공적으로 양리정후에 봉해졌고, 건위장군이 더해졌다. [[태화 (위)|태화]] 원년([[227년]]) [[조예|명제]]가 즉위하였는데, [[손권]]은 이때 예주 남쪽이고 장강에서는 400리 떨어진 동관에 주둔하고, 위나라 예주 군대는 수비하고 있는지라 오나라를 북쪽에서 위협하는 군대가 없어 오나라가 위나라의 침공을 받으면 동(여강)과 서(강하)의 군대를 합쳐 전력으로 항전할 수 있었다. 가규는 이를 타개하고자 예주에서 장강까지 이르는 직통로를 뚫어 오나라의 동서 군대가 서로 구원하는 형세를 끊고, 요구(潦口)로 나아가 주둔하면 동관을 취할 수 있다고 보았다. 명제는 이에 동의하였다. 이듬해, [[조휴]]가 오나라의 파양 태수 [[주방 (
원래 가규는 조휴와 사이가 나빠, 황초 연간 조비가 가규에게 절을 주려는 것을 조휴가 가규의 성격 문제를 들어 훼방을 놓았다. 협석에서 조휴가 졌을 때 가규가 없었으면 조휴는 구원받을 수 없었다. 그러나 《위략》에 따르면, 조휴는 가규가 늦게 온 것을 꾸짖고 조정에 상주하여 가규를 모함했으며, 가규도 돌아온 뒤 상주했다. 조정에서는 비록 가규가 옳지만, 조휴가 종실로 중임을 맡고 있었으므로, 아무에게도 잘못을 묻지 않았다. 가규는 마침 병이 위독해져 죽었다. 시호를 내려 숙후(肅侯)라 했으며, 《위서》에 따르면 향년 55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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