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래성 전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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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전국1=[[조선]]
|교전국2=[[일본]]
|지휘관1=[[송상현 (1551년) |송상현]]† <br /> [[이각 (조선) |이각]] <br /> [[박홍 (조선) |박홍]] <br /> [[조영규 (무신조선) |조영규]]† <br /> [[이언성]] <br /> [[홍윤관]]†
|지휘관2=[[고니시 유키나가]]
|병력1=2500~3000명 <br /> 군민 포함 2만 명
 
== 전투 과정 ==
[[1592년]] [[음력 4월 15일]] 일본군은 [[부산]] [[동래성]] 앞으로 몰려들었다. 경상좌병사 [[이각 (조선)|이각]]과 경상좌수사 [[박홍 (조선) |박홍]]이 지원을 왔으나 왜군의 수를 보고 전투를 치르기도 전에 도망쳐 버렸다. 양산군수 [[조영규 (무신조선) |조영규]] 역시 성 남쪽 4km까지 진출했으나 결국 후퇴했다.
 
이에 송상현 홀로 울산군수 [[이언성]] 등과 함께 전투를 치렀다. 일본의 고니시 유키나가는 새벽에 부산진성을 출발하여 오전 10시 동래성에 도착해 부대를 3개로 나누어 일대(一隊)는 황령산 기슭에, 다른 일대는 동래성 서편의 대로에, 마지막 일대는 취병장으로부터 남문을 향하도록 하여 성을 포위하였다.
 
[[동래성]] 안에서는 백성들까지 수비에 가담하여 저항하여 한동안은 일본군의 공격을 막아내는 듯하였으나, 일본군은 성곽이 낮고 수비가 허술한 동문의 인생문(人生門)을 집중공격함으로써 방어선을 뚫는 데 성공하였다.
성이 뚫리고 [[동래성]]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송상현 (조선)|송상현]]은 조복으로 갈아입고 고향의 부모에게 보내는 시 한 수를 쓴 뒤 일본군의 칼에 맞아 전사했다. [[송상현 (조선)|송상현]]의 부하 조방장 [[홍윤관]]과 [[김희수]], [[대송백]]도 전사하고 그리고 왜군을 보고 도망갔던 양산군수 [[조영규 (무신조선) |조영규]]와 울산군수 [[이언성]]이 응원차에 달려와 싸웠으나 [[조영규 (무신조선) |조영규]]는 전사하고 [[이언성]]은 포로가 되어 훗날 [[이덕형]]의 도움으로 석방되었다.
[[일본]]의 지휘관은 [[송상현 (조선)|송상현]]의 용감함에 감탄하고, 그의 사체를 정성스럽게 메워, 그 무덤에는 "충신(忠臣)" 이라고 쓴 목제의 비석을 세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