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양화나루와 잠두봉 유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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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합 필요|양화나루|양화나루}}
{{유형문화재 정보
|소재_국가=[[대한민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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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양화나루·잠두봉유적<br />(楊花나루·蠶頭峰遺蹟)
|지정_번호=제399호
|소재지=[[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96-1 외
|제작_시기=
|비고=규모: 36,245㎡
|지정연월일=[[1997년]] [[11월 11일]]
}}
 
'''양화나루''' 또는 '''양화진'''(楊花津)은 잠두봉과 주변에 있었던 [[나루터]]이다. 버드나무가 무성하고 경치가 뛰어나서 ‘양화답설(楊花踏雪)’이라고 일컫던 곳으로 조선시대에 중국사신이 오면 이곳에서 뱃놀이를 즐겼고, 사대부들의 별장이나 정자도 강변에 많이 세워져 있었다. 1882년 [[임오군란]] 이후 청나라와 일본을 비롯한 세계 열강들과 조약을 체결하면서 양화진 일대는 외국인의 거주와 통상을 할 수 있는 개시장(開市場)이 되었다.
'''절두산'''(切頭山) 또는 '''잠두봉'''(蠶頭峰)은 [[서울시]] [[마포구]] 합정동의 [[한강]]변에 있는 [[산]]으로, [[천주교]] 순교 사적지이다.
 
'''절두산 천주교 성지'''(切頭山天主敎聖地) 또는 '''잠두봉'''(蠶頭峰)은 [[서울특별시]] [[마포구]] 합정동 일대의 [[한강]]변에 있는 [[천주교]] 순교 사적지이다. 잠두봉은 봉우리가 [[누에]]의 머리를 닮았다고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양화나루(楊花津)까지 올라왔다가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이 [[양화나루]] 옆의 봉우리인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여 1만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잘린 목은 한강에 던져졌고, 머리가 산을 이루며 한강물이 핏빛으로 변하였다고 전해진다.
 
[[1966년]] 100주기를순교 100주년을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웠다. 이는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 이 곳에는 조선시대 때 박해로 순교한 천주교인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한국 천주교회 관련 사료 등이 있으며, 야외전시장에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신부의 동상과 순교자들의 묘와 비석 등이 있다.
 
[[1866년]] [[병인양요]]가 일어나 프랑스 함대가 양화나루까지 올라왔다가 돌아갔다. 이에 격분한 [[흥선대원군]]이 [[양화나루]] 옆의 봉우리인 잠두봉에 형장을 설치해 천주교인들을 처형하게 하여 1만여 명의 천주교인들이 이곳에서 죽었다. 그 뒤로 절두산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1966년]] 100주기를 기념해 천주교회에서 절두산순교기념관을 세웠다. 이는 2000년에 절두산순교박물관으로 개명했다. 이 곳에는 조선시대 때 박해로 순교한 천주교인들의 유해가 모셔져 있으며, 한국 천주교회 관련 사료 등이 있으며, 야외전시장에는 한국 천주교 최초의 [[사제]]인 [[김대건]]신부의 동상과 순교자들의 묘와 비석 등이 있다.
==같이 보기==
* [[절두산 순교 성지 기념관]]
* [[병인양요]]
* [[양화나루]]
 
==바깥 고리==
* [http://www.jeoldusan.or.kr/ 절두산순교성지 홈페이지]
 
== 참고 자료 ==
{{서울시공개자료}}
{{글로벌}}
{{대한민국문화재}}
{{토막글|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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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대한민국의 로마 가톨릭교회]]
[[분류:서울 마포구]]
[[분류:조선]]
[[분류:한국의 유적]]
 
[[en:Jeoldu-s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