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우영빈: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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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안남도]]에서 출생한 그는 젊은 시절 [[일본]]으로 건너갔으며 일본에서 [[도야마 미쓰루]]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다고 하며 이 시기쯤에 성씨를 하야시({{llang|ja|はやし}})
로 [[창씨개명]]을 하였다. 이후 [[경성부]] [[명치정]]에서 활동했으며 그는 1930년대 말 [[김두한]]과 대립하여 [[장충단 공원]]에서 결투를 벌인 뒤 결투에서 진 이후 자신의 패배를 인정하는 뜻으로 김두한에게 1.000원과 자전거 보관소를 넘겨주었다.<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1&oid=038&aid=0000059924 (정주영 神話) ① '신용은 목숨이다' 신조 ] [[한국일보]] 2001년 3월 21일 작성</ref><ref>[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59&r_serial=01 제9화 장충공원에서 일본깡패와 겨루던일] [[동아방송]] 1969년 10월 23일 작성</ref> 또한, 그는 [[도야마 미쓰루]]와 같은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나, 이들의 앞잡이 역할을 하던 다른 친일파들과는 상반된 활동을 펼쳐나가는 등 선우 종친회와 조선인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ref>[http://sports.chosun.com/news/life/200210/20021012/2al29004.htm "하야시는 조선인 협객이었다"] 스포츠조선 2002년 10월 11일 작성</ref>
 
김동회는 1999년 MBC가 방송 "''''깡패와 건달로 본 한국 100년'''"에서 다음과 같이 증언하였다.
{{인용문|장충단 대혈투 사건이 끝나고 [[선우영빈]](하야시)이 김두한에게 자전거보관소 운영권을 넘겼다. 이 후 김두한과 선우영빈은 형제와 같이 좋은 관계을 유지하였다.}}
 
김두한 회고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인용문|선우영빈이 [[김두한]]에게 달달이 용돈 보내주었다.}}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부인과 부하들만 [[일본]]으로 보냈다.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친일파]]의 청산을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구성되자 친일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ref> {{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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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한국 전쟁]] 이후 한국인 여성과 재혼하였고 건설산업를 설립하였으며 [[대한건설협회]] 서울지부장을 역임하는<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8062200099202017&editNo=1&printCount=1&publishDate=1968-06-22&officeId=00009&pageNo=2&printNo=699&publishType=00020 建協(건협)서울支部長(지부장) 鮮于永(선우영)씨를 選出(선출)] [[매일경제]] 1968년 6월 22일 작성</ref> 등 기업인으로 활동하였다. 그는 말년에 독실한 크리스천으로 [[교회]]에 다니기도 했다고 하며 사망한 연도는 [[1978년]]이라는 설이 있다.<ref>깜짝! 스토리랜드 [http://tv.sbs.co.kr/collection/tp1_review_detail.jsp?vVodId=V0000224831&vVodCnt1=00021&vVodCnt2=00 하야시는 조선인이었다.] [[SBS]] 2002년 12월 22일 방송</ref>
 
== 문화에 나타난 선우영빈 ==
== 선우영빈을 연기한 배우들 ==
* [[신현준]] - 《[[장군의 아들]]》(1990년 ~ 1992년) [[영화]]
* [[이창훈]] - 《[[야인시대]]》(2002년) [[SBS]] 드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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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같이 보기 ==
* [[도야마 미쓰루]]
* [[김두한]]
* [[김동회]]
 
[[분류:1908년 태어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