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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4년에 주군 테오도시우스 1세가 동서 로마를 통일한 뒤에는, 테오도시우스로부터 로마군 총사령관(마기스텔 · 우트리우스퀘 · 미리테)으로 임명된다. 이듬해 테오도시우스 1세는 사망하였고, 제국의 동쪽은 장남 [[아르카디우스]], 서쪽은 차남 [[호노리우스]]에게 맡겨졌고 그는 서로마 제국의 황제 호노리우스의 후견인을 맡았다. 하지만 아르카디우스나 호노리우스 모두 정무에는 관심조차 없었으므로, 이 무렵부터 스틸리코가 사실상의 서로마 제국의 최고 군사령관으로서 제국의 방위에 분주한다. 그러나 그에게는 반(半)야만족 출신이라는 딱지가 항상 붙어다녔고, 동로마뿐 아니라 서로마 제국의 관료들조차 그를 멀리했다.
 
동방에서부터 몰려온 [[훈족]]의 서방 진출은 게르만족의 대이동을 촉발시켰다. 가장 먼저 압력을 받은 것은 앞서 설명한 서고트족으로, 족장 알라리크가 정식으로 서고트족의 왕으로 취임하여(알라리크 1세) 로마군과의 동맹을 파기하고 제국 영토를 침범, 트라키아를[[트라키아]]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 이에 스틸리코는 동로마와의 공동방위노선을 택해, 메디오라눔(라틴어: Mediolanum, 지금의 [[밀라노]])을 포위한 서고트족 군대를 격퇴한다. 그러나 아르카디우스의 측근으로 친위대 장관이었던 루피누스의 방해로 알라리크를 더 추격하지 못하고 서로마로 귀환해야 했다. 루피누스는 스틸리코의 휘하에 있던 동로마군 소속 군단을 철수시킴으로서 방해에 성공했지만, [[콘스탄티노플]] 부근에서 자기가 이끌던 군사에게 살해당해 버린다.
 
397년에는 알라리크를 다시 한번 [[마케도니아]]에서 패배시켰지만, 알라리크가 주변의 산악 지대로 숨어드는 바람에 그를 붙잡는 데는 실패했다. 그리고 같은 해에 아프리카에서 발발한 길도의 반란을 진압하고, 이어 라에티아에서 반달족에 대한 전쟁을 전개, 401년, 403년에는 다시 세력을 키운 알라리크와 대치하며 많은 공을 세웠다.
스틸리코에 대한 통설은 다 쓰러져가던 로마 제국을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지켜낸 충성스러운 재상이자 장수였다는 평가가 주류를 이룬다. 하지만 정치적으로도 군사적으로도 불리한 상황에도 불구하고, 다 쓰러져가던 로마 제국을 지탱하려고 했던 스틸리코의 행동에 대해 로마의 사령관으로서의 책무, 내지는 죽은 테오도시우스 황제에 대한 충성심에서 나온 것이라는 설명과는 달리, 아직 동서로 완전히 분열되지 않은 틈에 스틸리코 자신의 아들을 차기 황제로 내세우려는 개인적인 야심 때문이었다는 설도 있다. 딸을 호노리우스에게 시집보낸 것도 그 포석이었을 거라는 설명이다. 알라리크를 마케도니아에서 패배시킨 일도, 스틸리코가 사실은 알라리크가 영토로 차지하고 있던 다르마티아의 속주를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고 했던 것은 아닐까 하는 지적이 있다. 로마가 하드리아노폴리스의 전투(378) 이후 고트족에게 잃은 다르마티아는 매우 풍요로운 토지로 당시 재정난으로 고민하던 스틸리코에게는 매력적인 곳이었다.
 
만약 이 두 가설이 사실이라면, 같은 입장에 있던 스틸리코와 루피누스의 대립관계도 이해하기 쉬워진다. 호노리우스의 시아버지이기도 했던 스틸리코가 더 이상 황제의 지위에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또 비옥한 다르마티아를 스틸리코가 차지하지 못하도록 동로마의 르피누스는 그의 병력을 없애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하게 하려고 했다는 것이다. 어쨌든 동ㆍ서 로마의 황제에게 있어 야만족의 수장 알라리크가 로마와 동맹을 맺었다는 사실은 반(半)야만족 인사였던 스틸리코를 대신할 인물이 나타났음을 의미했다. 또한 지위나 혈연도 황제에게 가까웠을 뿐 아니라 스스로 황제와 대적할 힘도 기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스틸리코가 동ㆍ서 로마의 경계심을 살 만한 경솔한 행동은 하지 않았을 것이다.
 
== 설명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