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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생애 ==
[[전라남도]] [[영광군|영광]] 출신으로 [[1426년]](세종 8년) 무과(武科)에 급제하여 관례에 따라 바로 권지 훈련원 녹사(權知訓鍊院錄事)에 임명되었다. 이후 여러 벼슬을 거쳐 당상관으로 승진, 절충장군으로 형조 참의(刑曹參議)로 승진했다가 외직인 황해도 관찰사(黃海道觀察使)로 나갔다. 그 뒤 [[1456년]](세조2년) 호조 참의(戶曹參議)가 되었다. 본처에게서 아들 자황을 얻었으며, 뒤에 첩에게서 아들 자광을 얻었다. 그의 첩이었던 [[유자광]]의 생모는 곧 따로 [[전라북도]] [[남원부]]로 분가하여 살았다.
 
[[1457년]](세조 3년) [[가선대부]](嘉善大夫)로 승진, 외직인 [[경주시|경주]][[부윤]](慶州府尹)에 올랐는데, 소송을 제기한 자 중 경주부윤인 유규에게 뇌물을 쓴 자가 있으므로 노하여 바로 끌어다가 형장(刑杖)을 치다가 죽었다. 뇌물을 주려던 송자를 장살시킨 일로 좌죄(坐罪)되어 파직되어 [[전라북도|전북]] [[남원시|남원]](南原)으로 퇴거하였고, 이후 관직에 제수되었으나 사향아고 오랫동안 벼슬하지 않았다.
그뒤 서자 유자광(柳子光)이 [[익대공신]](翊戴功臣)이 되자, [[예종]]이 그에게 특별히 [[가정대부]](嘉靖大夫) 행 [[중추부]]첨지사(行中樞府僉知事)를 제수(除授)하여 [[한성부]]에 와서 사은(謝恩)한 지 한 달 남짓 만에 늙었다는 이유로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그가 사직을 청하자 [[예종]]은 특별히 다시 승진시켜 [[자헌대부]](資憲大夫)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를 제수하여 전리(田里)로 돌아가게 하여 그 뜻을 이루어 주고 이어서 사는 고을에 명하여 녹봉을 주게 하였다.
 
[[1473년]] [[2월 10일]]에 [[남원]]에서 사망하니 사망당시 나이 73세였다. 유언을 내려, 그의 유언대로 상사(喪事)를 한결같이 《주자가례》(朱子家禮)대로 장례하게 하였다.
 
== 평가 ==
[[조선왕조실록]]의 졸기에 의하면 '아들 유자환(柳子煥)과 측실(側室)에서 낳은 아들 유자광이 있는데, 유규가 집에서 엄숙하여 자제를 대할 때에도 반드시 관대(冠帶)를 갖추고 만났다. 유자환·유자광이 출세하여 현달하였지만 그는 언사(言辭)나 용색(容色)으로 그런 표정을 지은 적이 없었으며없었'다고 검소하고한다. 겸손하게 처신하였으며 청렴하고 엄숙하여 칭찬을 받았다.
 
경상에 있었고 두 아들이 출세하였음에도 그는 평소 검소하고 겸손하게 처신하였으며 청렴하고 엄숙하여 칭찬을 받았다.
 
== 가족 관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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