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이난 전쟁: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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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이고군의 결성과 출발 ===
2월 4일 밤, 고네지메에서 돌아온 사이고는 간부들을 거느리고, 사학교 본교로 들어갔다. 다음날 5일, 사학교 간부 및 분교장 200여명이 집합하여 대 평의(評議)가 행해져, 차후의 방침이 의논되었다.
 
[[벳푸 신스케]]와 헨미는 죄를 묻기 위해 군대를 일으켜야한다고 주장하였지만, [[나가야마 야이치로]]는 사이고, 기리노, 시노하라 셋이 상경하여 정부를 힐문해야한다고 주장했다. 이 나가야마의 책략에는 [[야마노 다잇포]], 고노 슈이치로가 동조하였다. 하지만, 이케노우에는 암살을 꾸미는 정부가 상경 도중에 위해를 가할 우려가 있다고 주장하여 반대하였다. [[무라타 산스케]]는 세사람에게 적은 병력이 따라가야 한다고, [[노무라 오시스케]]는 노무라 자신이 적은 병력을 이끌고 해로로 오바마(小濱)로 나와, 거기서부터 육로로 교토에 가서, 행차 때문에 교토에 있는 천황에게 직접 아뢰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리하여 여러 의견이 나와 분규하였지만, 최후에 기리노가 “단(斷)이라는 한 글자만 있을 뿐, … 군대의 총 출병 외에 취할 수 있는 길은 없다.”라고 단안하여 전군 출병론을 많은 사람이 찬성하였다. 나가야마는 이 후에도 출병에 찬성하지 않았지만, 기리노의 설득에 후일 종군을 승낙하였다.
 
2월 6일, 사학교 본교에 '사쓰마 본당' 이라는 문패가 걸려, 종군자 명부 등록이 시작되었다. 이 날, 사이고를 중심으로 작전회의가 열려, 고베의 '해로에서 나가사키를 빼앗아, 거기서 군을 둘로 나누어 고베, 오사카와 요코하마, 도쿄의 본거지를 급습'하자는 안, 노무라 오시스케의 '세 길로 나누어, 하나는 해로에서 나가사키에서 상경, 하나는 해로에서 부젠(豊前), 분고(豊後)를 지나 시코쿠, 오사카에서 상경, 하나는 구마모토, 사가(佐賀), 후쿠오카(福岡)를 지나 육로로 상경'하는 즉 3도 분진(分進)안이 나왔지만 고베, 노무라 오시스케의 안은 증기선 3척밖에 군함을 가지지 않은 사쓰마군에게는 성공을 기대하기 어려웠고, 이케노우에의 '[[구마모토 성]]에 일부 방비역을 두고, 주력은 육로로 상경'하는 안이 채용되었다.<ref>『신편세이난전사(新編西南戰史)』등에서는 이케노우에의 안이 채용되었다고 하고 있어, 그에 따라 가와지리(川尻) 군의에서 이케노우에의 주력 상경, 일부 방비하자는 안과 시노하라의 전군강습안과 대립하여, 후자로 결정된 점에서 추측하면, 이때의 결론은 만연했던 육로 상경책이었던 가능성이 높다. 가와지리에 먼저 도착한 벳푸 신스케에게 구마모토대의 [[이케베 기치주로]]가 계책을 물었을 때, 벳푸가 계책은 없다고 대답했다는 구마모토대의『戰袍日記』에 기록되어있는 것이 이를 증명하고 있다.</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