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 (귀족):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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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1년에 백가는 동성왕이 사냥을 나갔을 때 백가가 군사를 동원하여 동성왕은 화살을 맞혀 살해하였다. 무령왕은 군대을 동원하여 백가의 목이 잘라 시체와 함께 백마강(白馬江)에 던져졌다. 백가의 반란은 마한 지역으로 세력을 확대한 백제와 마한과의 세력 다툼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501년 이후, 마한 세력은 전남현재의 전라남도, 창원등으로창원 등으로 내려 갔다. 전남전라남도 나주 지역의 마한 세력 무덤에서 금동 신발, 금관 왕관, 금관모, 신라 미추왕 무덤에서 출토된 서수형 토기 등이 출토되었다. 전남 마한의 유물은 신라 미추왕 주변에서 출토된 유물과 유사하였는데, 특히 금관의 경우 경주에서 출토된 금관과 형태가 매우 유사하였다. 금관은 창령 가야 지역에서도 일부 출토되었다. 나주 지역에서 출토된 유골을 분석한 결과 신라, 가야인의 유골도 발견되었다. 학계에서는 문화적 교류가 있었다고 해석한다.{{출처}}
 
[[분류:백제 사람]]
'''백가'''(苩加)는 백(白)자와는 한자가 달르고, 삼국사기에 기록된 2자 성명은 대체로 단순한 이름이었으므로, 백(白)씨라고 단정하기에는 어려운 부분도 있다. 한반도의 토착인들은 삼한 시대에는 대체로 성이 없었고, 고려 시대 왕건이 성씨 분성 정책에 따라서 성을 가졌기 때문에 백가의 후손이 있다면 한국에 흔한 성씨(김, 이, 박)로 창성하였을 가능성이 많다.
[[분류:생년 미상]]
 
[[분류:백제 사람]][[분류:501년 죽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