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두한: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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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돌이 (토론 | 기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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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V}}
{{다른뜻다른 뜻}}
{{정보표 인물
|그림= 31세_김두한.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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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사망일= {{사망일과 나이|1972|11|21|1918|5|15}}
|사망원인= 불명(사인은 [[뇌출혈]])<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거주지=
|별명= [[호 (이름)|호]] 의송 (義松), [[별칭]] 잇폰 ({{llang|ja|いっぽん}})
|학력= [[초등학교|서울 교동공립보통학교]] 1학년<ref>2학년 도중 다니지못했다.</ref>
|직업= [[군인]], [[사회 운동|청년운동가]], [[국회의원]], [[정치인]], [[사회 운동|사회운동가]], [[노동|노동운동가]]
|종교= [[무교]]
|배우자= [[이재희]], 김부미, 김순옥, 박정인
|자녀= 4남 2녀
|부모= [[김좌진]], [[오숙근]]
|친척= [[김옥균]] (12촌), [[김동진 (1891년)|김동진]] (3촌), [[김종진 (1901년)|김종진]] (5촌)
|서명=
|웹사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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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무= {{국기나라|대한민국}}
|복무 기간= [[1950년]] ~ [[1953년]]
|최종 계급= [[의병|대한의용군]] [[대장 (군인 계급)|대장]], [[학도병|대한 학도의용군참모장]]
|부대=
|지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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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한'''(金斗漢, [[1918년]] [[5월 15일]]~[[1972년]] [[11월 21일]])은 [[대한민국]]의 [[정치인]]·대한 학도의용군 참모장· 청년운동가· 사회운동가· 노동운동가이다.
[[일제 강점기]] 말 [[나이|약관]]의 나이로 주먹 황제로 군림하여 [[일본식 성명 강요]], [[황국신민 서사]] 등 [[민족말살정책]]에 거부하는 등 [[일본 제국]]에 저항하였다.<ref>[http://kordic.nate.com/dicsearch/view.html?i=6010500 네이트 국어사전]</ref><ref>[http://www.encyber.com/search_w/ctdetail.php?gs=ws&gd=&cd=&d=&k=&inqr=&indme=&p=1&q=%B1%E8%B5%CE%C7%D1&masterno=30777&contentno=30777 두산백과]</ref><ref>{{뉴스 [[해방]] 기에서는 잠시동안 [[조선공산당]]의 산하인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었으나 부친([[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후 이를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여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투쟁하였다. [[미군정]]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으며, [[제1공화국]] 초기 [[국가보안법]] 등 옥고를 치르기도 하였다.인용
|제목 = (언중언)청년의 힘
 
|url = http://www.kwnews.co.kr/nview.asp?s=301&aid=203031800006
[[한국전쟁]]에는 대한 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하였고 [[노동|노동운동]]에도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하였으며 [[대한민국 제3대 국회]] · [[대한민국 제6대 국회]] 등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비판하며 반[[독재]]등 [[민주화 운동]]에도 투쟁하였다. 6대 국회의원에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으로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하여([[사카린 밀수사건]]) [[국회]]에서 [[삼성]] [[이병철]]과 [[박정희]] 정권을 비판하며 [[국무위원]] 등에게 오물을 투척하였다. ([[국회오물투척사건]])
|출판사 = [[강원일보]]
|저자 =
[[경기도]] [[수원]] [[신민당]] 후보로 [[대한민국 제7대 국회]]의원 선거 유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10월 유신|유신]] 벽보를 뜯는 등 비판해오다 [[1972년]] [[11월 19일]]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며 나간 뒤 어딘가에서 쓰러져 [[혼수상태|의식불명]] 상태로 가망 없는 퇴원 직후 [[11월 21일]] 오전 9시 5분에 사망하였다.<ref>길거리에서 쓰러졌는지 다른 곳에서 쓰러져 서울 센추럴 호텔에 옮겨졌는지 서울 센추럴 호텔에서 쓰러졌는지 병원으로 누군가에 의해 옮겨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ref> 대변에도 능하여 연설 등에서 지지를 받기도 했다.
|쪽 =
|작성일자 = 2003년3월 19일
|확인일자 = }} </ref> [[한국의 군정기]]에는 [[조선공산당]]의 산하인 조선청년전위대 대장으로 있었으나 부친([[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후 이를 탈퇴하고 [[우익]]으로 전향하여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서 대립했다. 그러나 그의 극단적인 활동으로 [[미군정]]에서 체포되어 [[사형]]선고를 받기도 했다.<ref name="공보부"/> [[제1공화국]] 당시 [[1949년]] [[노덕술]] 등 친일파들에 의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암살표적]]이 되기도 했으며, [[6월 17일]]에는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ref name="국가보안법"/>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대한 학도의용군 등 전선에 참전했으며 [[노동|노동운동]]에도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다. [[대한민국 제3대 국회]] · [[대한민국 제6대 국회]] 등 [[국회의원]]을 지내면서 [[이승만]] 정권, [[박정희]] 정권의 [[독재]]에 비판하였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대한민국 제6대 국회|대한민국 제6대 국회의원]]에 당선 직후 [[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에 연루되어 옥고를 치렀고, 한국 비료 주식회사([[삼성]])가 [[사카린]]을 밀수하다 발각된 [[사카린 밀수사건|사카린 밀수사건]]으로 [[대한민국 국회|국회]]에서 [[삼성]] [[이병철]]과 [[제3공화국|정부]]를 비판하며 발언 도중 장관, [[국무위원]]들에게 [[국회오물투척사건|오물]]을 투척하였다.
 
[[대한민국 제7대 총선]] [[경기도]] [[수원]] [[신민당]] 후보로 선거 유세에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전깃불 관련 발언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찬양했다는 혐의로 [[반공법]]으로 옥고를 치렀고. 이후에는 [[10월 유신|유신]] 벽보를 뜯는 등 비판하다 [[1972년]] [[11월 19일]] 사람을 만나러 나간다며 나간 뒤 어딘가에서 쓰러져 [[혼수상태|의식불명]] 상태로 가망 없는 퇴원 직후 [[11월 21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오전 9시 5분에 사망했다.<ref>길거리에서 쓰러졌는지 다른 곳에서 쓰러져 서울 센추럴 호텔에 옮겨졌는지 서울 센추럴 호텔에서 쓰러졌는지 병원으로 누군가에 의해 옮겨졌는지 알 수가 없다고 한다.</ref><ref name="백만불미스터리">{{뉴스 인용|url=http://wizard2.sbs.co.kr/vobos/wizard2/resource/template/contents/06_review_image_detail.jsp?vProgId=1000292&vVodId=V0000247952&vMenuId=1004681&rpage=6&cpage=14&vVodCnt1=00015&vVodCnt2=00 |제목= 백만불 미스터리 |발행일자= 2003년 9월 1일 |출판사= [[SBS]] |확인일자= }}</ref> 대변에도 능하여 연설 등에서 지지를 받기도 했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본관]]은 [[안동김씨|안동]], [[김상용 (1561년)|김상용]](金尙容)의 12대손이며 [[호 (이름)|호]]는 [[의송]](義松), [[별칭]]으로는 잇폰({{llang|ja|いっぽん}})이다.
[[본관]]은 [[안동김씨|안동]], [[김상용 (1561년)|김상용]](金尙容)의 12대손이며 [[호 (이름)|호]]는 [[의송]](義松), [[별칭]]으로는 잇폰({{llang|ja|いっぽん}})이다.
 
== 생애 ==
==== 생애출생과 초기유년기 ====
==== 출생과 유년 ====
[[파일:난중생활 1년여 고국와서 또 유리, 풍전등화같은 고부생명, 백치 김좌진유족 참경.JPG|썸네일|300px|right|김좌진의 피살 이후 아들 김두한 등 유가족이 유린당하며 풍전등화 참상에 대한 [[1932년]] [[12월 23일]]자 [[조선중앙일보|중앙일보]]]]
 
[[1918년]] [[5월 15일]] [[서울특별시|경성부]] [[종로구]]에서 [[김좌진]]의 아들로 출생하였다. [[1924년]] 6세 때 외조모와 함께 [[만주]]에서 부친 [[김좌진]]과 상봉했으나,<ref> {{뉴스 인용
|제목 = 기미년에 군정사 창립, 군사운동의 기초, 기미년 만주로 망명한 동지와 악수, 놀라운 소식을 전하던 운동의 기초, 長逝한 김좌진 일생(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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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작성일자 = 1932년 12월 23일
|확인일자 = }} </ref> 당시 [[봉오동 전투]]와 [[청산리 전투]] 이후 일제의 [[간도 참변]], 그리고 [[자유시 참변]]으로 민족진영과 공산 진영 간에 대립<ref>[http://100.nate.com/dicsearch/pentry.html?i=280049 한족총연합회] [[네이트]] 백과사전</ref> 등으로 [[경성]]으로 다시 오게 되었다. 이후김두한은 [[초등학교|서울 교동공립보통학교]]에 잠시 다녔으나 [[조선총독부]] 의해 김좌진의 가족으로서 요시찰인([[불령선인]]) 감시와 집안의 사정으로 다니지 못하였고 [[개성]]에서 살다 [[1930년]] 10세 때 [[개성]]에서 혼자 [[경성부|경성]]에 왔으나, 거지들에게 잡혀 [[수표교]] 아래에서 살아가다 원씨 성의 한 노인을 만나 17세까지 성장하였다. "왜놈의 공부는 할 필요가 없다. 곧 독립하니 그때 공부하라."라는 원 노인의 뜻에 따라 학교는 다니지 않고 운동에만 전념하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제6화 소년시절과 우미관 뒷골목 이야기
|url =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58&r_serial=02
줄 85 ⟶ 86:
|확인일자 = }} </ref><ref name="나의가족">{{뉴스 인용|url=http://www.kimeuldong.com/sub07/sub07_2.asp |제목=김을동 의원 홈페이지 나의가족 김두한 |발행일자= |출판사= |확인일자= }}</ref>
 
==== 청년 시절청년기 ====
[[File:1944년,_반도의용정신대_시절.JPG‎|섬네일|[[1944년]], 반도의용정신대를반도의용정신대 이끌던 시절당시, 앞쪽 맨 왼쪽이 김두한.]]
 
이후 노인노인의 마저사망 죽음 뒤이후 김두한은 서울에 주먹들을 눕히며 [[1935년]] 나이 18세에 [[우미관]]<ref> {{뉴스 인용
|제목 = 우리나라 최초의 映畵館 優美館 없어진다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2111800209206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2-11-18&officeId=00020&pageNo=6&printNo=18808&publishType=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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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작성일자 = 1982년 11월 18일
|확인일자 = }} </ref>을 중심으로 주먹 왕으로 군림하였는데군림했는데, 일반적으로 악행을 일삼는 무리가 아닌 [[상인]]들을 보호하는 등 일제에 저항하였다. 또한, 일본의 [[야쿠자]]와 [[장충단 공원]]에서 맞붙기도 하였으며했으며 [[일본인]]들이 [[우미관]] 근처 다니기를 꺼릴 정도였다고 하며한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우미관
|url = http://blog.naver.com/jjh4858?Redirect=Log&logNo=150029351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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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작성일자 =
|확인일자 = }} </ref> 이 때문에 [[상인]]들로부터 신망을 얻었다고얻었다.<ref 한다name="한국일보 종로구">{{뉴스 인용|url=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life/200310/h2003102716502738100.htm&ver=v002 |제목= 87년째 손님 하나에 옷도 하나 |발행일자= 2003년 10월 27일 |출판사= [[한국일보]] |확인일자= }}</ref> 또한한편 [[1930년]] 후반 배우 [[김승호]]를 [[동양극장]] 극단에 소개하고 곤경에 처한 권투선수 [[정복수]], 레슬링 선수 [[황병관]]을 도와주기도 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흔들리는 職業倫理 (3)「代價제일」에 무너지는 프로精神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9101800329210007&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89-10-18&officeId=00032&pageNo=10&printNo=13557&publishType=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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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작성일자 = 1989년 10월 18일
|확인일자 = }} </ref> [[태평양 전쟁]]이후 [[1942년]] 일제의 조선인 강제 [[징용]]으로 징용장이 발부되자, [[조선 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 의용정신대)이 조직되었다. 이 단체는 수색, 철도공사 등에서 근로작업을 했다. 이때 징용피신처로 들어온 인물 중 [[이천시|이천]]에서 온 [[이정재 (1917년)|이정재]]도 만났다. [[1944년]] [[이재희]]와 혼인하였다.<ref name="나의가족"/>
|확인일자 = }} </ref>
 
[[태평양 전쟁]]이후 [[1942년]] 일제의 조선인 강제[[징용]]으로 징용장이 발부되었는데, [[조선 총독부]]와 협상하여 경성특별지원청년단(반도 의용정신대)을 조직되었다. 한편, [[1944년]] [[이재희]]와 혼인하였다.<ref name="나의가족"/>
 
=== 광복 후 ===
[[1945년]] 해방 이후 김두한은 [[건국준비위원회]], 등에[[건국치안대]] 참여하여등에서 일본군활동했다고 무기고를 점령하거나 치안에 힘을 기울이며 활약하였다한다. 그러나 곧 [[한국의 군정기]]로 [[건국준비위원회]] 등 단체들이 해체되자 죽마고우이기도 한 [[프롤레타리아트]] [[공산주의]]이던 [[정진영 (사회주의 운동가)|정진영]], 만담가 [[신불출]], [[박헌영]]의 인연으로 [[조선 공산당]]의 전위대장을 역임했으며맡았으며 [[인민군]] 남조선 사령관 ([[소장 (군인 계급)|소장]])을 임명하는 제의도 있었다고 한다.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김두한이조선공산당 전위대장으로 역임있을 한 이후당시 민족진영에서는 [[조선 공산당조선공산당]]에 대해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ref name="백의사">{{뉴스 인용|url= |제목= 비밀결사 - 백의사 |발행일자= 2002년 1월 20일 |출판사= [[MBC]] |확인일자= }}</ref> 이후 임시정부 계열 비밀결사인 [[백의사]], 그리고 [[이규갑]], [[장덕수]] 등에게 [[김좌진]]의 죽음에 대해 알게 된 김두한은 [[조선 공산당]]을 탈퇴 및 [[우익]]으로 전향하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제25화 해방후 대한민청 모체에 대해
|url =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3&r_serial=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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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김구]], [[이승만]], [[김규식]] 명예회장, [[유진산]] 회장, 그리고 김두한은 감찰부장 겸 별동대 총대장으로 역임하여 [[대한민청]]이 조직되고 [[대한민청]]의 [[지도자|실질적 지도자]]로 [[반탁운동]] 등 좌우대립에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산정호수]] [[김일성]] 별장습격, [[박헌영]] 납치미수, [[국군준비대]] 습격, [[학병동맹]] 습격, [[전평]] 본부습격, [[심영 (배우)|심영]], [[신불출]] 습격, [[9월 총파업]] 등에 활약하였고,<ref> {{뉴스 인용
|제목 = 한강하구 군사사3-한국전쟁기(종합)
|url = http://www.tongi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69309#
줄 144 ⟶ 143:
|쪽 =
|작성일자 = 1969년 12월 6일
|확인일자 = }} </ref> [[남로당]] 총책이었던 [[박갑동]]에 의하면 [[미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안심했고오히려 별동대에 잡히면 죽는다며안심했다며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한다.<ref name="백의사"/> 김두한은 좌우대립 과정에서 김두한은 5회 피습당했다고 한다. 또한,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에 체포대상이었던 [[박흥식 (기업인)|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에 습격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과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한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제37화 정치자금 에피소드
 
|url =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66&r_serial=01
김두한은 좌우대립 과정에서 5회 피습당했다고 하며 이후 계속해서 좌우대립에서 우익의 선봉장으로서 활약하였으며 청년단체 자금을 마련하기 위해 훗날 [[반민특위]]에 체포대상이었던 [[박흥식 (기업인)|박흥식]] 등 [[친일파]] 자본가들 집에 습격하기도 했다고 하며 1원도 사사로운 곳에 쓰지 않았다는 근거로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자신의 집을 [[저당]]과 [[이승만]]의 친필 휘호를 보여주며 [[영수증]]을 썼다고 한다.
|출판사 = [[동아방송]]
|저자 = 노변야화
|쪽 =
|작성일자 = 1969년 11월 29일
|확인일자 = }} </ref>
 
[[1947년]] [[대한민청]] 사건 등으로 [[미군정]] 의해 포고령 위반으로 체포되어 [[사형]]을 선고받았다. 3심 판관이 사퇴제출하는 등 재판 과정에서도 좌우간에 대립이 극심하였고, [[1948년]] [[3월 21일]] [[김구]]는 "근일에 김두한 군의 사건을 보아도 우리가 얻는 바 교훈이 많다. 김 군이 자기범행에 대해서 법적 제재를 받는 것은 당연하다고 말할 수 있으나, 그 범행이 애국적 동기에서 나왔다고 간주할 수 있으며, 또 그가 위대한 애국자 김좌진 장군의 영사(令嗣)라는 점에서 보면, 그에 대한 구명운동이 그토록 열렬하지 못하다고 아니할 수 없다. 그러면 우리는 과연 어떻게 할 것인가"라고 말하였다.<ref> {{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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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정부수립제1공화국과 한국 전쟁 ===
[[1948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암살표적]], [[김구]]의 암살 시기인 [[1949년]] [[6월 17일]] [[국가보안법]]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ref name="국가보안법">{{뉴스 인용|url=|제목= 金斗漢 大韓靑年團 건설국장,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에 송청 |발행일자= 1949년 9월 10일 |출판사= [[한성일보]] |확인일자= }}</ref><ref name="김구">{{뉴스 인용|url=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73&r_serial=03 |제목= 제67화 백범 김구선생 암살에 관계됨 |발행일자= 1949년 09월 10일|출판사= [[동아방송]] |확인일자= }}</ref>
==== 제1공화국 ====
[[1948년]] [[대한청년단]]의 감찰국장 겸 건설국장을 역임하기도 하였다. 이후 노동운동에 투신하여 노동운동가로서도 활동했으며 [[이승만]]에게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요직제의가 왔으나 독재노선에 들어선 [[이승만]]에 난색 하여 거절하였다. 이후 [[이승만 정부]]에 의해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 및 정부요인 암살 음모 사건|암살표적]], [[김구]]의 암살 시기인 [[1949년]] [[6월 17일]] [[국가보안법]] 등으로 투옥되어 옥고를 치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金斗漢 大韓靑年團 건설국장, 국가보안법 위반 등으로 서울지검에 송청
|url =
|출판사 = 한성일보
|저자 =
|쪽 =
|작성일자 = 1949년 09월 10일
|확인일자 = }} </ref><ref name="김구">{{뉴스 인용|url=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73&r_serial=03 |제목= 제67화 백범 김구선생 암살에 관계됨 |발행일자= 1949년 09월 10일|출판사= [[동아방송]] |확인일자= }}</ref>
 
[[한국전쟁]]이 나자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에게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도움을 준 4명은 한강을 건너 뒤 사라졌다고 하며 누군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ref name="김구"/> 김웅수 장군은 회고록에서 "한강 방어선에서의 기억이다. 30일경 김두한 씨의 내방을 받았다. 자기 동료에게 총기를 주어 일선 배치를 요구하여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고 회고하였다.<ref name="삼통사">{{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62700329205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6-27&officeId=00032&pageNo=5&printNo=10690&publishType=00020 |제목= 6.25를 回想(회상)한다 (5) 三統士(삼통사)는 지금 어디에… |발행일자= 1980년 6월 27일 |출판사= [[경향신문]] |확인일자= }}</ref><ref name="김웅수">{{뉴스 인용|url= http://isan.tistory.com/85?srchid=BR1http%3A%2F%2Fisan.tistory.com%2F85 |제목=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김웅수장군회고록 |발행일자= |출판사= |확인일자= }}</ref> 이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었다고 한다.<ref> {{뉴스 인용
=== 한국전쟁 ===
[[한국전쟁]]이 나자 김두한은 과거 별동대의 대원으로 추정되는 4명에게 극적으로 배를 구해 한강을 건널 수 있었다고 한다. 도움을 준 4명은 한강을 건너 뒤 사라졌다고 하며 누군지는 알 수 없다고 한다.<ref name="김구"/> [[김웅수]] 장군은 회고록에서 "한강 방어선에서의 기억이다. 30일경 김두한 씨의 내방을 받았다. 자기 동료에게 총기를 주어 일선 배치를 요구하여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 고 회고하였다.<ref name="삼통사">{{뉴스 인용|url=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0062700329205008&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0-06-27&officeId=00032&pageNo=5&printNo=10690&publishType=00020 |제목= 6.25를 回想(회상)한다 (5) 三統士(삼통사)는 지금 어디에… |발행일자= 1980년 6월 27일 |출판사= [[경향신문]] |확인일자= }}</ref><ref name="김웅수">{{뉴스 인용|url= http://isan.tistory.com/85?srchid=BR1http%3A%2F%2Fisan.tistory.com%2F85 |제목= 4) 맥아더 장군의 일선 시찰과 중공군 소속 북한 의용군-김웅수장군회고록 |발행일자= |출판사= |확인일자= }}</ref> 이후 [[인민군]]과 전투를 벌었다고 한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제68화 6.25도강 피난
|url = 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73&r_serial=04
줄 183 ⟶ 178:
|쪽 =
|작성일자 = 1970년 1월 12일 방송
|확인일자 = }} </ref> 또한, [[이승만]]에게서 [[국민방위군]] 사령관 등 요직제의가 왔으나 독재노선에 들어선 [[이승만]]에 난색 하여 거절기도 했다.
|확인일자 = }} </ref>
 
한편.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제1권 1950년에 의하면 [[1950년]] [[8월 17일]] [[북한군]]은 낙동강을 건너 대구를 공격했지만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물러났다. 그 와중인 8월 18일, 대구에 있던 정부는 부산으로 피난했다. [[1960년]] 제35회 국회에서 부산진 을구 의원 박찬현은 “특무대가 수천 명씩 긴급 구속해서 매일 저녁 수십 대의 트럭에다가 가득 사람을 실어가지고 철사로 모두 묶어 바다에 던져버리거나 해운대, 김해, 양산 등지에서 기관총 등으로 학살했다”고 고발했다. 부산의 비극은 그것만이 아니었다. 박명림에 따르면,“부산에 결집한 상당수 고위층과 부유층 인사들은 배를 부산항에 대놓고 전황이 여의치 않을 경우 일본으로 탈출할 계획을 세우기도 했다. 이미 일부는 제주도로 피난간 상태였다. 일본으로 밀항은 당시 이른바 돼지몰이로 불렸다. 밀항 주선 비용은 1인당 50만원, 나중에는 100~150만원까지 이르렀다. 밀항을 위한 선박 대절비는 500만원에서 1000만원에 이르렀다. 서울, 대전, 부산에서 도망행렬을 볼 때 이들의 국가수호 의지가 어느 정도였는지 이해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법무장교 태윤기에 따르면 임시 수도 부산의 혹심한 상류사회 비리와 부패는 아예 이곳에 들리고 싶지도 않도록 만들었다.”
 
김두한의 회고에서는 “부산은 혼란의 도가니였다. 먼저 내려온 정부 고위층 가족들은 전쟁에 아랑곳없이 환락에 잠겨 있었고 부산 유흥가는 전쟁을 모르는 채 화려한 네온사인에 뒤덮여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나는 부산 앞바다 20리 전방에 수백 쌍의 기동선이 전세를 관망하면서 일본 도피를 꿈꾸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이들은 대부분 정부 고위층과 사회 유력인사들의 가족이라고 했다. 100리 전방에서는 치열한 전투가 벌어지고 있는데 민족의 자유를 수호하는 전쟁에 아랑곳없이 보화를 싣고 자식들만 데리고 일본으로 피난 가려는 가증한 반민족 모리배를 용서할 수 없었다. 그들에게서 출전 자금을 뜯어내려고 결심한 나는 이른 새벽에 발동선 한 대를 강제로 징발했다. 기관총 1정을 싣고 특공대원에게 권총을 휴대시킨 후 내가 선두에 서서 부산 앞바다 20리 지점에 정박하고 있는 그들의 배에 올라타 금품을 강제로 희사 받았다.당시 그들의 선실을 뒤졌을 때 나는 그들의 화려함에 놀란 정도가 아니라 기절할 뻔했다. 군대에 가야 할 적령기에 있는 젊은이가 여인들과 춤을 추고 있었고, 외래품으로 몸을 감은 그들은 양주병을 앞에 놓고 엔조이에 한창이었다.”
 
김두한은 다음에는 쌍권총으로 무장하고 광복동에 있는 늘봄댄스홀로 갔다고 한다.“댄스홀 앞에는 고급 세단과 군 고급장교 지프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었다. 나는 늘봄 댄스홀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양손에 권총을 들고 16발을 공중에 발사했다. 쌍쌍이 춤을 추던 남녀가 한꺼번에 땅에 엎드렸다. 불과 100여리 전방에서는 전투가 치열해 젊은 청년들이 쓰러져가고 있는데, 전쟁에 아랑곳하지 않는 특권층들은 여자들과 함께 일대 육체의 향연을 베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반민족분자들을 나는 치고 때리고 했다. ‘너희들이 가진 금품을 이 광주리에 담아라. 나는 단순한 금품강도가 아니다. 포항 작전에 의용군으로 참여했다 부상당해 돌아온 500명의 학도병 치료비로 쓸 것이다. 또다시 국가와 민족을 망각하고 춤을 추러 다니는 년놈은 부산 앞바다에 수장시켜 버릴 테니 알아서 하라.”라고 말했다.
 
[[강문봉]]의 회고에서는 “낙동강 방어선이 형성되면서 육군본부에서는 김익렬 대령에게 헌병 1개 소대를 주어 부산항만 일대 선박에 대해 수색토록 했다. 유명 정치인과 고위 장성까지 붙들려 왔는데 이들은 도망갈 준비를 하고 배에 탄 채 염탐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는 중령급 이상 8명이 체포됐다.”라고 말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한국 현대사 산책』 1950년대 편 제1권 195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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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정치활동 ===
[[파일:대한민국_제3대_민의원_당선후.JPG‎|섬네일|오른쪽|[[1954년]] [[5월 20일]] [[대한민국 제3대 국회]]의원 당선후]]
[[파일:1954년 여야 국회의원 기념사진.jpg|섬네일|오른쪽쪽|[[1954년]] 서울 정동 배재학당에서 열린 여야 국회의원 친선 야구경기를 마치고 선수들이 기념사진, 왼쪽은 [[민관식]], 오른쪽 첫 번째는 김두한, 두 번째는 [[김영삼]]]]
[[파일:사사오입 개헌 당시.JPG|섬네일|왼쪽|[[사사오입 개헌]] 파동 무렵의 이야기하고 있는 [[민관식]], [[이철승]], 김두한]]
[[파일:사사오입 개헌 당시.JPG|섬네일|오른쪽|[[사사오입 개헌]] 파동 무렵의 이야기하고 있는 [[민관식]], [[이철승]], 김두한]]
[[파일:1956년 7.27데모.jpg|섬네일|왼쪽|[[1956년]] [[7월 27일]], (앞) 김두한, (뒤) [[조병옥]] 비롯해 야당의원들]]
[[파일:이정재 사단의 국회난입사건.jpg|섬네일|오른쪽|[[이정재 (1917년)|이정재]] 사단의 [[대한민국 국회|국회]]에 난입 김두한 의원 협박사건에 대한 [[동아일보]] [[1956년]] [[2월 16일]]자]]
[[파일:1956년 7.27데모.jpg|섬네일|오른쪽|[[1956년]] [[7월 27일]] 김두한, [[조병옥]]을 비롯한 야당의원들]]
[[파일:1954년 여야 국회의원 기념사진.jpg|섬네일|왼쪽|[[1954년]] 서울 정동 배재학당에서 열린 여야 국회의원 친선 야구경기를 마치고 선수들이 기념사진, 왼쪽은 [[민관식]], 오른쪽 첫 번째는 김두한, 두 번째는 [[김영삼]]]]
 
김두한은 1954년 5월 20일 제3대 국회의원 선거에 [[종로구]] 을구 4선거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자유당]]에서 [[이승만]]의 종신제를 위한 무소속 의원들을 끌어들이기 위해 김두한은 [[이승만 정부]]를 비판한 혐의로 선거법 위반과 부하 김관철에게 충고하며 공포탄을 쏜 것이 원인이 되어 김관철 살해미수로 구속되었는데, 개원식 전날에 [[자유당]] 입당 조건으로 석방되었다.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이승만]] 종신제 추진 핵심인물에 한 명이었던 [[장경근]]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비화제일공화국 (167) 제7화「사사오입」改 개헌(6)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3122100209204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3-12-21&officeId=00020&pageNo=4&printNo=16070&publishType=00020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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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1973년 12월 21일
|확인일자 = }} </ref> [[자유당]] 의원총회에서 [[이승만]] 종신제 추진 핵심인물에 한 명이었던 [[장경근]]의 뺨을 때리기도 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김두한의 장경근 구타 사건·개헌열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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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1976년 11월 03일
|확인일자 = }} </ref> [[1956년]] 1월 진보당추진위원회에 조직부로 참여하였다. 그러나 부흥주택대지부흥주택 대지 2중 매매 혐의로 시경에 내사받았고 진보당을 탈퇴하였고탈퇴한 뒤 노농당으로 옮겼다.<ref>한국일보 1956년 4월 21일</ref><ref> {{뉴스 인용
|제목 = 조봉암과 1950년대(상)(역비한국학연구총서 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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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199
|작성일자 = 1999년 12월 15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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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이승만 정부]]에 대한 비판하였고 [[이정재 (1917년)|이정재]]에게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으로 협박을 당했으나<ref> {{뉴스 인용
 
|제목 = (김영삼前대통령 회고록 탈고)"58년 부정총선때 유일한 낙선"
1956년 2월 [[이정재 (1917년)|이정재]]에게 [[국회]] 휴게실에서 권총으로 협박을 당했으나<ref name="YS이정재">{{뉴스 인용|url=http://www.donga.com/fbin/output?n=200001020144 |제목= (김영삼前대통령 회고록 탈고)"58년 부정총선때 유일한 낙선 |발행일자= 2000년 1월 2일 |출판사= [[동아일보]] |확인일자= }}</ref> [[이정재 (1917년)|이정재]]를 호통쳤다고 한다.<ref name="YS">{{뉴스 인용|url= |제목= YS "야인 너무 보고 싶다" 김두한 장남 경민씨 초대 비화 공개 |발행일자= 2003년 4월 22일 |출판사= 굿데이 |확인일자= }}</ref> 야당은 테러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당사자 김두한은 야당의 결성을 반대하였다.[[1956년]] [[7월 27일]] 지방선거 입후보 방해에 대한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시위를 한 7.27 데모사건에서 [[김종원 (1922년)|김종원]] 치안국장의 지휘하에 거리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ref> {{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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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박재균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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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2000년 1월 2일
|확인일자 = }} </ref> [[이정재 (1917년)|이정재]]를 호통쳤다고 한다.<ref name="YS">{{뉴스 인용|url= |제목= YS "야인 너무 보고 싶다" 김두한 장남 경민씨 초대 비화 공개 |발행일자= 2003년 4월 22일 |출판사= 굿데이 |확인일자= }}</ref> 야당은 테러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조사위원회를 결성하려고 했으나 당사자 김두한은 야당의 결성을 반대하였다.[[1956년]] [[7월 27일]] 지방선거 입후보 방해에 대한 야당 국회의원들이 거리시위를 한 7.27 데모사건에서 [[김종원 (1922년)|김종원]] 치안국장의 지휘하에 거리시위를 진압하는 [[경찰]]들과 몸싸움을 벌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제76화 7.27 의원 데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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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자 = 1974년 12월 1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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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19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였다.<ref>조성관,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6) 122페이지</ref> [[1957년]] [[5월 25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총책임자를 맡았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3대 국회 당시 [[한국불교태고종]], [[대한불교조계종]] 대립에서 비구승을 옹호하여 [[종로구]]에 [[대처승]]의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았으며 또 당시 민주당 바람 영향 등으로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종로구에서 노농당 후보, [[대한민국 제5대 국회]] [[충남]] 홍성에서 무소속, 6대 국회 종로구에서 무소속 등 연이어 낙선하였다. 이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선거운동에 참여하였고 전국고학생연맹 등 고학생들을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며 신기범<ref> {{뉴스 인용
 
[[1956년]] [[10월 13일]] 배재학원 운동장에서 열린 제1차 여야 민의원 친선 야구대회에 참가하였다.<ref>조성관, 실물로 만나는 우리들의 역사 (웅진씽크빅, 2006) 122페이지</ref> [[1957년]] [[5월 25일]] [[장충단 공원]]에서 열린 야당 시국강연회에서 경호총책임자를 맡았다. 제4대 국회의원 선거에서 제3대 국회 당시 [[한국불교태고종]], [[대한불교조계종]] 대립에서 비구승을 옹호하여 [[종로구]]에 [[대처승]]의 본부를 두고 있던 종교 인사들에게 탄압을 받았으며 또 당시 민주당 바람 영향 등으로 [[대한민국 제4대 국회]] 종로구에서 노농당 후보, [[대한민국 제5대 국회]] [[충남]] 홍성에서 무소속, 6대 국회 종로구에서 무소속 등 연이어 낙선하였다. 이후 제4대 대통령 선거에서 [[조병옥]] 선거운동에 참여하였고 전국고학생연맹 등 고학생들을 지원하는데 인색하지 않았다 하며 신기범<ref> {{뉴스 인용
|제목 = 김두한씨 사진 공개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1&oid=001&aid=000036627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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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작성일자 = 1962년 3월 1일
|확인일자 = }} </ref>
|확인일자 = }} </ref> 이후에 김두한은 [[5.16]]에 대해 관망하는 입장이었으나 군의 원대복귀한다는 공약을 믿고 애국단을 조직하였으나 곧 해체되었다.
 
====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
{{본문|한국독립당 내란음모사건}}
 
[[1965년]] [[한일협정]] 반대 등으로 [[보궐선거]]에서 [[용산구]] [[한국독립당]] 후보로 출마하여 당선되었다. 그러나 [[1966년]] [[1월 8일]]에 5단계 혁명계획을 수립하고 정부전복을 기도하였다는 [[국가보안법]] 위반 및 내란음모 혐의로 구속되었다.<ref> {{뉴스 인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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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쪽 =
|작성일자 =
|확인일자 = }} </ref> [[1월 29일]] [[국회]]에서 김두한 의원 석방결의안이 통과되었고 [[4월 28일]]에 5년을 구형받은 이후 [[5월 10일]]에 김두한을 비롯한 모두 전원 무죄선고되었다. 이후 김두한은 [[용산]]에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서울시장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생계를 이주시키게 하였고 판잣집철거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앞장섰다고 한다.
 
이후 김두한은 [[용산]]에서 이재민이 발생했을 때 서울시장과 만나 봉천동에 터를 마련해서 생계를 이주시키게 하였고 판잣집철거문제와 갈등이 발생할 때마다 앞장서기도 했다 한다.
 
==== 국회 오물 투척 사건====
{{본문|국회 오물투척사건}}
 
[[1966년]] [[9월 22일]] 한국 비료 주식회사가 [[사카린]]을 [[밀수]]한 사건으로 국회에서 대정부 질문 중 무소속 김두한은 국회발언대에서 발언했는데 발언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인용문2|[[이병철]]이 [[밀수]]를 할 수 있었던 것은 정부가 범죄를 저지를 만한 환경을 조성해 줬기 때문이다. [[민족주의]]를 파괴하고 재벌과 유착하는 부정한 역사를 되풀이하는 현 정권을 응징하고자 한다. 국민의 재산을 도둑질하고 이를 합리화시키는 당신들은 총리나 내각이 아니고 범죄 피고인에 불과하다. 그러니 우선 너희들이 밀수한 사카린 맛을 봐라.|국회회의록 中<ref name="백만불미스터리">{{뉴스 인용|url=http://wizard2.sbs.co.kr/vobos/wizard2/resource/template/contents/06_review_image_detail.jsp?vProgId=1000292&vVodId=V0000247952&vMenuId=1004681&rpage=6&cpage=14&vVodCnt1=00015&vVodCnt2=00 |제목= 백만불 미스터리 |발행일자= 2003년 9월 1일 |출판사= [[SBS]] |확인일자= }}</ref>
}}라고 비판하며 [[국무위원]]등에게 미리 준비한 [[똥|인분]]을 투척하였다.
 
이후 [[이병철]] 한국비료 사장(삼성 그룹 회장)은 사카린 밀수사건과 관련 한국비료를 국가에 헌납하고 언론 및 학원 사업에서 손을 뗄 것을 선언하였다. 그후 이병철 사장은 헌납 교섭을 맡았던 장기영 부총리가 해임되자 개각 1주일 만인 1967년 10월 11일 한국비료 주식의 51%를 국가에 헌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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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죽음 ===
[[1972년]] [[11월 19일]] 사람을 만나러 나갔다가 쓰러져 [[11월 21일]] [[나이]]오전 9시 5분 [[55서울 성북구]]세로 사망하였다정릉동 무허가 자택에서 사망했다.<ref name="연작 에세이">{{뉴스 인용|url= http://www.kbs.co.kr/end_program/2tv/sisa/mother/vod/vod.html |제목= 연작 에세이 어머니 탤런트 김을동 조강지처 편 |발행일자= 2003냔 8월 25일 |출판사= [[KBS]] |확인일자= }}</ref> 장례는 [[조시원]]이 장례위원장으로 광복장으로 치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故(고) 金斗漢(김두한)씨 葬禮式(장례식) 내일 光復同志葬(광복동지장)으로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7211240020920702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72-11-24&officeId=00020&pageNo=7&printNo=15738&publishType=00020
줄 366 ⟶ 362:
|쪽 =
|작성일자 = 1972년 11월 25일
|확인일자 = }} </ref><ref>[http://www.kimeuldong.com/images/sub07/img_29.gif 노제때 어린이들이 절을 올리고 있는 모습]</ref> [[1975년]] 11월 22일에 묘비가 세워졌다.<ref> {{뉴스 인용
|제목 = 金斗漢씨 묘비제막
|url =
|출판사 = [[조선일보]]
|저자 =
|쪽 =
|작성일자 = 1975년 11월 22일 7면
|확인일자 = }} </ref>
 
==== 의문 ====
그의 사인은 현재도 의문으로 남아 있는데, 권도원 박사는 "김두한은 병이 없고 간이 강한 목양체질이었다."라고 하며 인체 오장육부의 대소 강약 배열에 따라 나눈 여덟 가지 체질 중 하나인 목양체질은 간이 강하고 몸집이 크며 병치레가 적은 건강한 체질이며 사상의학적 기준으로는 태음이라며 김두한의 체질에 대해 말했다. 권도원은 당시 50세이던 김두한을 찾아온 중풍은 왼쪽 팔과 다리를 쓰지 못하는 중증이었다. 치료가 늦으면 자칫 반신불수까지 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김두한은 불과 20여 일의 침 치료로 깨끗이 완치됐다고 말했다. 그리고 타고난 강골답게 치유속도도 보통 사람보다 빨랐다고 하며 한창때 돌연사할 확률은 적다고 말하며 사망에 대해 의혹을 주장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김두한은 병모르는 목양체질"…주치의 권도원씨
|url = http://chejil.net/cgi-bin/CrazyWWWBoard.cgi?db=notice&mode=read&num=225
|출판사 = 굿데이
|저자 = 권오용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2년 11월 8일
|확인일자 = }} </ref>
 
박정인은 사망 일주일 전 자택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양복 입은 여러 인물과 언성이 높은 말싸움을 한 적이 있다고 한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박정인은 11월 19일 저녁에 서울 센추럴 호텔에 한 방에서 김두한이 쓰러져 있다는 정체를 밝히지 않는 한 통의 전화를 받고 난 뒤, 쓰러져 있었다는 한 방에는 김두한은 없었고 테이블에 마시다 남은 주스 4잔이 있었다고 하며 그 중 한잔은 주스가 3/2 정도 남았다고 한다. 이후 호텔 직원이 고려병원으로 갔다는 말을 듣고 고려병원 응급실로 간 박정인은 응급실에는 김두한의 주위에 여러 청년이 있었다고 하며 접수하고 다시 응급실로 온 박정인은 김두한의 주위에 있었던 청년들은 사라졌다고 한다. 한편, 당시 응급실 레지던트 손광수는 환자가 혼수상태로 입원했고, 검사결과는 뇌출혈, 외상은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멀쩡한 사람이 혼수상태로 되려면 그만한 충격이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장녀 [[김을동]]은 어떤 작가를 만났는데, 미국여행을 하다 만난 사람이 자신이 중앙정보부 직원이었다고 하면서 내가 김두한 씨의 마지막을 지켜본 사람이었다는 말을 했다고 한다. 장남 [[김경민 (언론인)|김경민]] 또한 중앙정보부의 개입에 관한 이상한 느낌을 받았다고 하는데, 김두한이 사망 이후 100일이 됐을 때 [[이후락]]의 연락으로 만난 적이 있었다고 한다. [[김경민 (언론인)|김경민]]은 [[이후락]]은 별다른 말은 하지 않고 자신을 쳐다보는데 아주 섬뜩하고 기분이 나쁜 눈빛이었다고 말했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SBS]] [[백만불 미스터리]]에서 김두한의 사망에 대해 취재한 윤영휘 PD는 "김두한은 66년 국회 오물 투척 사건 이후 선.후배들이 모두 등을 져 외톨이 신세가 됐다. 67년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우세를 보였지만 개표 도중 반공법 위반으로 체포되는 등 시련이 잇따랐다. 타살이 아니라 하더라도 김두한은 당시 시대적 상황 때문에 때이른 죽음을 맞을 수밖에 없었다."라고 말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김두한은 시대의 희생양이다"
|url = http://isplus.live.joinsmsn.com/news/article/article.asp?total_id=1796012
|출판사 = [[일간스포츠]]
|저자 = 김영현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3년 9월 1일
|확인일자 = }} </ref>
 
== 역대 선거 결과 ==
줄 373 ⟶ 399: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
|[[대한민국 제3대 총선|제 3대 총선]]||[[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종로구 을)]]||3대||[[무소속]]|| ||8,762표||1위||[[파일:Vote1국회의원당선.svgpng|16px25px|종로구 국회의원 당선]]당선
|-
|[[대한민국 제4대 총선|제 4대 총선]]||[[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종로구 을)]]||4대||노농당|| ||8,987표||2위||낙선
줄 381 ⟶ 407:
|[[대한민국 제6대 총선|제 6대 총선]]||[[서울 종로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종로구)]]||6대||[[무소속]]|| ||||2위||낙선
|-
|[[대한민국 제6대 총선|제 6대 보궐선거]]||[[서울 용산구의 국회의원|국회의원(서울 용산구)]]||6대||[[한국독립당]]|| ||||1위||[[파일:Vote1국회의원당선.svgpng|16px25px|용산구 국회의원 당선]]당선
|-
|[[대한민국 제7대 총선|제 7대 총선]]||[[수원시의 국회의원|국회의원 (수원시)]]||7대||[[신민당 (1967년)|신민당]]|| ||21,770표||2위||낙선
줄 398 ⟶ 424:
 
== 평가 ==
* 굿피플 101인 정치·경제·연예·체육·문화계 (고인,현역사망자 포함)에서 정치계 인물 중 한 사람으로 선정되었다.<ref>(굿피플 101인) 정치·경제·연예·체육·문화계 굿데이 2003년 09월 17일</ref><ref>굿피플 101인 선정과정 2003년 09월 17일 굿데이</ref><ref>굿피플 101인 뽑고보니… 굿데이 2003년 09월 17일</ref>
 
* 바른 사회 밝은 정치 시민연합(상임대표 전득주 숭실대 교수)에서 조사한 역대 가장 훌륭한 국회의원으로 [[신익희]], [[조병옥]], [[제정구]] 등과 함께 선정되었다.<ref> {{뉴스 인용
* 전 통일부총리 [[권오기]]는 그는 조악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결코 야비하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인간 김두한은 시원시원한 말투와 예의를 지닌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하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16대 의정활동 조순형,김근태 1위
|url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92501030423301002
|출판사 = [[문화일보]]
|저자 = 천영식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3년 9월 25일
|확인일자 = }} </ref>
 
* 전 통일부총리 [[권오기]]는 "조악하고 거칠기는 했지만 결코 야비하지는 않았은, 시원시원한 말투와 예의를 지닌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다고 말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조선 제일의 협객 김두한이오
|url = http://book.donga.com/bookview.php?id=010006&cate1=0100&cate2=0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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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김종문 (1919년)|김종문]]은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으며 이미 고인이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몹시 그리워지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문학평론가 [[임긍재]], 또 한 사람은 전 국회의원 김두한 씨이다. 이 두 사람은 비록 활동분야는 달랐지만, 애국 의협 결단의 기질에 있어 공통점을 갖고 있었고 나는 지금껏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인물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라고 말했다.<ref name="삼통사"/>
* 바른 사회 밝은 정치 시민연합(상임대표 전득주 숭실대교수)에서 조사한 역대 가장 훌륭한 국회의원으로는 [[신익희]], [[조병옥]], [[제정구]], 김두한 의원이 선정되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16대 의정활동 조순형,김근태 1위
|url = http://www.munhwa.com/news/view.html?no=2003092501030423301002
|출판사 = [[문화일보]]
|저자 = 천영식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3년 9월 25일
|확인일자 = }} </ref>
 
* [[김종문 (1919년)|김종문]]은 '이제 [[한국전쟁]] 30주년을 맞으며 이미 고인이 되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몹시 그리워지는 두 사람이 있다. 한 사람은 문학평론가 [[임긍재]], 또 한 사람은 전 국회의원 김두한 씨이다. 이 두 사람은 비록 활동분야는 달랐지만, 애국 의협 결단의 기질에 있어 공통점을 갖고 있었고 나는 지금껏 우리 사회에서 그런 인물들을 거의 만나지 못했다.'라고 말하였다.<ref name="삼통사"/>
 
* 변사 [[김선동]]은신출은 [[평양]]의 한 극장에서 김두한을 만났는데, 만나고 "변사를 하러 왔다"'는 내 말을 듣고 "'열심히 해라."'라며 김두한이 사준 따뜻한 우동의 맛을 나는 아직도 잊을 수 없다고없다."라고 회고하였다말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관객 울리고 웃긴「無聲(무성)영화 스타」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110100020921100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91-10-10&officeId=00020&pageNo=11&printNo=21616&publishType=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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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대한민국의 대통령|대한민국 제14대 대통령]] [[김영삼]]은 "의송의 손은 조그맣고 예뻤다."라며 "그 주먹으로 주먹 왕 됐다는 사실이 믿어지지 않았다."라며 "발도 작았다"며". (중략) 의송은 호탕했고, 의협심이 강했던 인물이었기의 매력을 느꼈다."라고 말했다평했다.<ref name="YS"/>
 
* [[거스 히딩크]] 감독은 그가 한국의 독립에 일생을 바친 백야독립운동가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고, 부친이 암살되는 바람에암살되어 고아로 자랐으나 정의의 주먹으로 뒷골목까지뒷골목을 제패한 역사적인 협객이었으며, 나중에 국회의원까지 됐다는 얘기를 듣고는듣고 "같은 남자로서 무척 매력적인 캐릭터."라고 인물평을 말했다평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히딩크 "김두한, 딱 내 스타일"
|url = http://news.chosun.com/svc/content_view/content_view.html?contid=20021206701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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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협객[[1916년]]부터 김두한도 우리 집의 단골손님이었습니다.3대째 [[서울 종로구]]에서 [[1916년]]부터종로양복점을 3대째운영한 양복점을이경주는 운영한"우리 이경주가집의 단골손님이었다. (조부 이두용과 부친 이해주에게서 전해 들은 이야기로) 일제강점기 종로 일대의 한국상인들을한국 상인들을 일본 주먹으로부터 보호해준보호해 준 김두한의 옷에 얽힌 일화는 두고두고 회자하고회자되고 있다. 김두한은 특히 고학생들에게 자상했다며자상했으며, 그들이 찾아오면 “전당포에서'전당포에서 돈과 바꿔 쓰라”며쓰라'며 입고 있던 양복을 선뜻 벗어주었다고벗어주었다."라고 한다말했다.<ref> {{뉴스name="한국일보 인용종로구"/>
|제목 = 87년째 손님 하나에 옷도 하나
|url = http://news.hankooki.com/ArticleView/ArticleView.php?url=life/200310/h2003102716502738100.htm&ver=v002
|출판사 = [[한국일보]]
|저자 = 송채수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3년 10월 27일
|확인일자 = }} </ref>
 
* 배우 [[윤일봉]]은윤일봉은 "서울 명동의 '나일구' 다방은 당시 영화인들의 만남의 장소였는데 회합 때마다 김두한 의원이 나와서 위로와 격려를 해줬다."라며 "(중략) 영화인의 고충과 자부심을 이해하는 정신적 후원자였기 때문에 당시 스타들 모두가 김 의원을 존경하고 따랐다."라고 회고했다말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김두한-김지미, 최고주먹 VS 최고미인
|url = http://www.bcpark.net/bbs/1305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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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김동길 (1928년)|김동길]]은 "[[한국 전쟁]] 당시 청년의용군에 들어가 며치 지내기도 했는데 거기서 단장격인 김두한씨를 만났다. 얼굴에는 천연두를 앓은 흔적이 좀 남아 있었고, 문자 그대로 기골이 장대한 사나이였다."라고 고 회고했다말했다.<ref name="김동길">{{뉴스 인용|url=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2010/05/28/2010052802784.html|제목= (월간조선) (60년 전, 6·25는 이랬다) 김동길 연세대 명예교수 |발행일자= 2010년 5월 28일 |출판사= [[조선일보]] |확인일자= }}</ref>
 
* [[김웅수]] 장군은 자신의 회고록에서 "한강 방어선에서의 기억이다. 30일경 김두한 씨의 내방을 받았다. 자기 동료에게 총기를 주어 일선 배치를 요구하여 그의 애국심에 감탄하였다."라고 회고했다.<ref name="김웅수"/>
 
* [[범진]] [[스님]]은스님은 “암울한"암울한 시대를 살면서 의로운 일만을 했던 김두한의 재는 의미가 높습니다높다. 천도재를 주관한 범진 스님은 “여법한여법한 천도를 했으니, 이제 김두한을 재조명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스님은 또 “김두한이(중략) 말년에 부처님에 귀의하고 도선사에 있던 청담스님의 제자가 된 것 등은 참으로 아름다운 일이다.”라고"라고 말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김좌진 김두한 영산대재 현장
|url = http://ibulgyo.com/archive/20801/200608071154994599.a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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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황금일 의정부 성신보육원 원장은, [[1972년]] [[11월 21일]] [[서울 성북구]] 정릉동 김두한의 빈소를 찾은 의정부 성신 보육원 황금일 원장은찾으며 "고인의 검약 상에 깜짝 놀랐다며놀랐다. 대지 20평 남짓한 초라한 주택도 그렇거니와, 가구며 세간살이 어느 것 하나 백야 [[백야 김좌진]] 장군의 아들이며 2선 국회의원 출신의 유명인사답지 않게 초라했다며초라했다. 독립 유공자 연금증서를 통째로 보육원에 맡겨 운영비에 보태 쓰도록 한 처사로 보면 여유 있는 살림인 줄 알았는데, 생각과는 너무 달랐다고달랐다."라고 한다하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지평선) 김두한 신드럼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10&oid=038&aid=000015688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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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종로]] 2가에 있던 [[화신백화점]] 4층 화신 이발관에서 근무했던근무한 이발사 이상희는 “범접할"범접할 수 없는 무게와 당당함을 갖춘 분이었지분이었다. 요즘의 깡패들과는 차원이 달랐어달랐다. (중략) 말하며 “머리가머리가 비상하고 기억력이 좋았으며 특히 말을 잘했다.”며 김두한은 평소에는 과묵하다 싶을 정도로 말을 아꼈지만 한 번 입을 열었다 하면 한두 시간 정도는 눈 깜짝할 새에 지나갈 정도의 능변이었다는 것,능변가였다. 또 늘 신문 잡지 등 읽을 것을 손에서 떼어놓는 법이 없었다. 며 “교동국민학교교동국민학교 2학년 중퇴의 학력이라고는 볼 수 없을 정도로 학구적인 모습에 매우 놀랐다.”고 회고하였다. 또, 이상희는(중략) [[야인시대]]를 보며 실제와 드라마가 똑같다고 느낀 점은 시장 [[상인]]들이 김두한을 대하는 태도태도였다. 김두한은 상인들로부터의 존경과 지지가 대단했으며, 종로 거리를 걸을 때는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라고 고 한다말했다.<ref name="이발관이발사">{{뉴스 인용|url= http://www.greenmarathon.com/GmcBoard/read.cgi?board=free_board1&y_number=66 |제목= 김두한 단골 이발사의 기억 |발행일자= 2002년 12월 29일 |출판사= 굿데이 |확인일자= }}</ref>
 
* [[4.19 혁명]] 당시 학생운동가이자학생운동가, [[대한민국 제6대 국회]] 당시 비서를 지냈던 서용화 [[강릉대]] 교수 [[서용화]]은교수는 "전국을 호령한 주먹 왕이었던 만큼 무서운 사람일 것이라는 일반적 이미지와는 다르게 항상 경어를 쓰는 등 품격을 갖춘데다 의협심이 강해 바른길을 가려고 부단히 노력한 정치인이었습니다정치인이었다. 김두한 의원에 대해 "주먹계 시절과는 달리 정치계에선 조직 없이 독불장군이었지만 올바른 길이라고 판단되면 카리스마와 정의감으로 대단한 영향력을 발휘했다.”고 말했다. 또 김두한 의원이 당시 대통령 경호 실장을 지냈던 [[차지철]] 국회의원과 국회 본회의장 안에서 갑자기 "'당신 힘이 장사라며, 나하고 한 번 붙어볼까?”라며'라며 웃통을 벗어 던지는 '깜짝쇼’를깜짝쇼'를 벌이는 등 호걸다운 면모도 보여줬다고 일화를 소개했다보여줬다. [[서용화]] 교수는 "김두한 의원은(중략) 생전에 해방 직후 대한민청으로 우익활동을 한 것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으로부터 암살당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고 밝혔다. [[서용화]] 교수는 "김두한 의원이 과도한 [[반공]] 활동으로 일반에 다소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한 것과 해방 후 [[노동운동]]과노동운동과 함께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감에 기반을 둔 정치활동을 한 부분은 높게 평가돼야 한다.”라고"라고 말했다.<ref> name="강원도민일보">{{뉴스 인용|url=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68384 |제목= "김두한은 정의파 정치인" |발행일자= 2002년 10월 24일 |출판사= 강원도민일보 |확인일자= }}</ref>
|제목 = "김두한은 정의파 정치인"
|url = http://www.kado.net/news/articleView.html?idxno=68384
|출판사 = [[강원도민일보]]
|저자 = 全寅洙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2년 10월 24일
|확인일자 = }} </ref>
 
* [[이만섭]]은 "바른 소리 하는 사람들이 오래 살아야 ... 김두한 의원은 너무 일찍 돌아가셨어요."라며 죽음을라고 안타까워했다말했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 서윤환 전 [[서대문 형무소]] 교도관 서윤환은교도관은 "김두한과 관련한 정보도 몰래 빼내 가족들에게 전해주었다. 당시 [[중앙정보부]]와 경찰의 시퍼런 눈이 항상 그 주변을 감시하고 있었다. 만약 적발되면 구속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분의 민족주의 사상과 사나이다움에 반해 죽을 각오를 하고 정보를 건넸다."라고 말했다밝혔다.<ref name="성조기"/>
 
* [[곽태영]]은곽태영은 "[[백범 김구]]를 암살한 [[안두희]]를 찔려 살해미수혐의로 양구경찰서에 수용돼 갇혀 있을 때 노인네들이 찾아와 "'젊은이가 민족의 원수를 갚았으니 이제 편히 눈을 감겠다."'라고 할 때나 김두한 씨가 면회와면회 와서 5만 원의 영치금을 놓고 갈 때는 심장이 펄펄 뛰는 감격을 느꼈다."라고 회고하였다말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잠깐… 5분인터뷰 白凡(백범)암살범 安斗熙(안두희)살해기도 郭泰榮(곽태영)씨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83062700209202009&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83-06-27&officeId=00020&pageNo=2&printNo=18993&publishType=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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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김성환]] 화백은화백의 만화 [[고바우 영감]]에서 [[국회오물투척사건]]을 적군 일개 대대를 섬멸할 수 있는 것보다 더한 위력이라고 평가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內閣(내각)이부끄러워 辭表(사표)낸 汚物洗禮(오물세례)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9123000209206011&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9-12-30&officeId=00020&pageNo=6&printNo=14839&publishType=00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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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재인홍성군민회장김석기 김석기는재인홍성군민회장은 “제가"제가 중학교 1학년 때던가요, 김좌진 장군의 아들인 김두한 씨가 선거 유세차 5일장이 서는 날에 맞춰 홍성에 왔던 광경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정치니 뭐니 이런 복잡한 것은 하나도 몰랐지만, 어린 마음에 그분의 카리스마에 압도당하면서도 ‘저렇게 유명한 분이 고향이라고 우리 홍성을 찾아오는 걸 보면, 애향심이라는 게 참 무시 못할 건가 보다’라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라고"고 회고했다밝혔다.<ref> name="용봉산">{{뉴스 인용|url=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161 |제목= “용봉산 정기 받았으니 큰일꾼 돼야죠 |발행일자= 2008년 02월 22일 |출판사= 홍성타임스|확인일자= }}</ref>
|제목 = “용봉산 정기 받았으니 큰일꾼 돼야죠”
|url = 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34161
|출판사 = 홍성타임스
|저자 = 윤진아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8년 02월 22일
|확인일자 = }} </ref>
 
* 김진섭 홍성고 교사는 [[대한민국 제5대 국회]] 당시 김두한의 선거 사무장을 맡았던 홍성고등학교사무장으로 교사있었을 김진섭은 "그는 선거운동 기간 약 한 달 정도 홍성에 머물렀습니다머물렀다. 합동유세를 하면 각 후보들이 추첨을 통해 연설 순서를 정했는데 김두한이 첫 번째로 하게 되면 청중들이 그의 연설만 듣고 흩어지기 때문에 그 다음 연설을 진행하기 어려울 정도로 지역 대중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지요받았다. 김두한은 연설문을 두 번만 읽으면 바로 외워버릴 만큼 두뇌가 비상했습니다비상했다."고 말하며 (중략) 세간에 알려진 것과는 달리 김두한은 파리나 개미 같은 하찮은 미물이라도 함부로 때려잡지 못하는 여린 심성을 가졌다고 전했다가졌다. 선거가 7월 한 여름에 치러졌기 때문에 가는 곳마다 파리가 많았는데 그는 귀찮게 달려드는 파리를 한번도 때려잡는 걸 보지 못했을 정도라고정도다. 하며(중략) 김두한에게 높이 살만한 점은 누구도 갖지 못한 용기와 의리를 가졌고, 어려운 사람을 절대 그냥 지나치지 않는 인정의 소유자였다고 하며소유자였다. 후배 누가 찾아와 어려운 사정을 얘기하면 즉각 그 자리에서 돈이든 패물이든 자신이 가진 것을 주저 없이 내놓는 화끈한 사람이었다고사람이었다."라고 회고했다말했다.<ref> name="홍성지역사">{{뉴스 인용|url=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09 |제목= 창간14주년특집/<야인시대> 김두한과 홍성지역사 |발행일자= 2002년 11월 23일 |출판사= 홍성타임스|확인일자= }}</ref>
|제목 = 창간14주년특집/<야인시대> 김두한과 홍성지역사
|url = http://www.hs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9709
|출판사 = 홍성타임스
|저자 = 조성미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2년 11월 23일
|확인일자 = }} </ref>
 
* [[독립운동가]] [[황학수]]는 항일투쟁회고에서항일 투쟁 회고에서 "(전략[[김좌진]]) 장군이 암살됨에 따라 중요인물이 계속 공산당에 암살당하게되어 한국독립군은 가위재기불능의 곤경에 빠지게 되었다. 서기1933년[[1933년]] 연장군령실께서는 유골을 모시어 충청남도 보령군 청소면재정리 능동묘지에 안치하였고 유자 김두한은 조국광복과 반공의 제물이 된 장군의 유지를 받들어 최일선에서 공산당과 싸워이겨 대한민국수립의 역군이 되었다."라고 고 말했다회고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抗日闘爭回顾(항일투쟁회고) (6) (下(하))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2080800329102008&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62-08-08&officeId=00032&pageNo=2&printNo=5160&publishType=00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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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확인일자 = }} </ref>
 
=== 비판적부정적 평가 ===
* [[한국의 군정기]] 당시 좌우대립과정에서 극단적인 [[좌익]]에 대한 탄압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ref> {{뉴스 인용
* 역사학자인 [[한홍구]]는 김두한에 대해 "우리 역사에서 참으로 악역을 많이 맡았지만, 분명히 그 어딘가 미워할 수 없는 구석이 있다.", "나름대로 자기 입장을 갖기 위해 열심히 살았지만, 그는 주변의 모사들에 의해 이용되는 경우가 많았고, 끝내 자신의 이름보다 장군의 아들이란 아버지의 후광 속에 들어가야만 빛을 발하는 존재가 되고 말았다."라고 평가했다. <ref> {{뉴스 인용
|제목 = 황당한,브리태니커 그러나백과사전 미워하기 힘든…
|url = http://h21enc.hanidaum.co.kr/arti/culturenet/culture_generaldic100/6497contents.html do?query1=b03g1558a
|출판사 = [[한겨레21브리태니커]]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2년 11월 14일 제433호
|확인일자 = }} </ref>
 
* [[한홍구]] 교수는 2002년 12월 4일 제437호 [[한겨레21]]에서 [[드라마]] [[야인시대]]의 방송당시 동료(고경태 기자) 기자가 김두한 얘기 안 쓰고 뭐하느냐고 그래서<ref name="한홍구21">{{뉴스 인용|url=http://www.hani.co.kr/section-021061000/2002/12/021061000200212040437037.html |제목= 비판하며 아플 때도 있다” |발행일자= 2002년 12월 4일 제437호 |출판사= [[한겨레21]] |확인일자= }}</ref> "황당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란 제목으로 [[2002년]] [[11월 14일]] 제433호을 통해 말했다.
* 1945년 [[8·15 광복]] 이후 해방정국에 좌·우익 대립에서 [[9월 총파업]], [[전평]] 습격 등 [[좌익]]에 대한 살상에 대한 비판이 있다.<ref>[http://enc.daum.net/dic100/contents.do?query1=b03g1558a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브리태니커]] 김두한 항목</ref>
 
{{인용문|(전략)장군의 아들, 그것은 김두한을 상징하는 말이다. 한 개인을 논할 때 그 사람 개인이 아니라 누구의 아들이라는 것이 그 사람을 상징하는 수식어가 된다는 것은 그 인물이 끝내 아버지의 후광을 벗어나지 못했다는 것이 된다. 그만큼 김두한 신화에서 김좌진의 위치는 절대적이다. 아버지의 후광이 없었다면 김두한은 그저 뒷골목 깡패의 보스나 해방 뒤 백색테러의 행동대장의 하나로밖에는 기억될 수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김좌진 장군과 쌍벽을 이룬 홍범도 장군의 아들을 기억하지 않는다. 이준 열사의 아들로 진짜 독립군 대장이 되어 중국대륙을 누빈 이용(李鏞) 장군을 기억하는 사람도 거의 없다. 이용 장군은 북에서 고위직을 지냈기 때문이다.(후략)<ref> {{뉴스 인용
|제목 = 황당한, 그러나 미워하기 힘든…
|url = http://h21.hani.co.kr/arti/culture/culture_general/6497.html
|출판사 = [[한겨레21]]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2년 11월 14일 제433호
|확인일자 = }} </ref>
}}
 
{{인용문|사실은 더 과격한 놈인데 <한겨레21>에 맞추진 않는가 하는 질문인가요 (웃음) 그렇지는 않을 거예요. 김두한을 해방 직후 정부 수립 과정에서 보인 우익적 행태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에는 아주 안 좋은 면을 썼을 거예요. 글에서 조금 더 좋게 써줬다면 권력의 꼭두각시 역할만 하다가 나름대로 자기 역할을 찾으려고 노력한 흔적이 보이기 때문이에요. 국회에서 똥물 뿌린 게 최후의 일인데, 누가 시켰다고도 얘기합니다만 전 그렇게 뿌린 행동 자체가 민심을 대변한다고도 봐요. 적어도 50년대 국회의원 하면서 자유당의 개헌시도에 맞서서 야당쪽에 선 것은 평가를 해줘야죠.<ref name="한홍구21"/>
}}
 
그러나 [[이용 (1888년)|이용]]은 [[1889년]]생인 [[김좌진]]보다 [[1888년]]생으로 한 살이 많으며, [[1930년대]]와 [[1940년대]]에 [[한국의 독립운동|만주의 독립운동]] 당시는 거의 와해한 상황으로서 대륙을 누릴 수 없는 상황이다. [[일본군]] 출신 박정희와 만주 제8단에서 복무한 [[신현준]], [[방원철]] 등은 토벌 기회가 전혀 없었으며 놀고 술 먹을 기회가 많았다.”라고 말하기도 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중위 진급 한달 뒤 일제패망에 낙담 해방 이듬해 패잔병 몰골 귀국선 타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47&aid=0000049417&
|출판사 = [[오마이뉴스]]
|저자 = 정운현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4년 8월 24일
|확인일자 = }} </ref> 그리고 [[김옥균]]과 [[김좌진]]의 촌수로는 친가는 11촌, 양가는 19촌이며<ref> {{뉴스 인용
|제목 = '김좌진과 김두한, 김을동과 송일국' 4대 이야기
|url = http://media.daum.net/entertain/broadcast/view.html?cateid=1032&newsid=20060614103315807&p=nocut
|출판사 = [[노컷뉴스]]
|저자 = 공지영 (CBS 아주 특별한 인터뷰)
|쪽 =
|작성일자 = 2006년 6월 14일
|확인일자 = }}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김옥균(고균),김좌진(백야)의 가계도...장동김씨,장김(壯金),(신)안동김씨
|url = http://k.daum.net/qna/openknowledge/view.html?category_id=QNO001&qid=3lyAm&q=%B1%E8%BF%C1%B1%D5+11%C3%CC&srchid=NKS3lyAm
|출판사 = [[다음]] 오픈지식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9년 3월 5일
|확인일자 = }} </ref> [[대한민국 제3대 국회]] 당시 [[이승만]]을 민족반역자 발언만 하고 의정 활동은 하지 않았다고 말하며 이승만 민족반역자 발언 관련으로 [[김성수 (1891년)|김성수]]를 독립운동가로 그리는 것은 우연이 아니라고 말했는데, 그러나 [[김구]] 등 독립운동가의 묘가 있는 [[효창공원]]을 최소화하기 위해 효창공원을 운동장 설치 반대, 판잣집 철거 청원 등 자유당의 독재에 반대하던 의원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으며 [[정준]] 의원은 "나나 김 의원(김두한)도 정 의원([[정대천]])의 노력에 동참, 머리를 맞대고 영세민들을 위한 법안마련을 위해 많은 고민을 하기도 했다."라고 말했다.<ref>[[대한민국 국회]] 제3대국회 제22회 제29차 국회본회의 1956년 6월9일 효창공원운동장설치에관한건의안</ref><ref name="정준의원"/><ref>[http://likms.assembly.go.kr/record/index.html 대한민국 국회 회의록 시스템 김두한 검색결과정보] [[대한민국 국회]</ref>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친일설에 대해서는 현재도 논란에 있다.<ref>위키백과 [[김성수 (1891년)|김성수]]</ref>
 
* [[강준만]] 교수는 "김두한은 극단적이긴 하지만 예외적인 사례는 아니다. 일반 민중들에게 있어서, 해방정국과 이후 6 25 전쟁에서의 반공과 친공은 이데올로기보다는 원한관계와 얽혀 있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래서 더더욱 대화와 타협은 불가능했다. 또 그래서 그 시절에 저질러진 학살도 근대적 국가기구에 의해 감정 중립적, 관료적 방식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전근대 시절 부족 간의 전쟁에서 나타난 것처럼 무자비한 살인과 강간, 재산의 탈취, 피학살자를 거의 동물 수준으로 전락시키는 극히 잔인한 방식으로 진행되었다."라고 말했는데,<ref> {{뉴스 인용
|제목 = 한국현대사산책 1940년대편
|url =
|출판사 = 인물과사상사
|저자 = [[강준만]]
|쪽 =
|작성일자 =
|확인일자 = }} </ref> 실제로 [[1945년]] [[8월 16일]]부터 [[8월 23일]]까지 보복사건에 대한 조선 종전의 기록에 의하면 일본인 경찰 폭행은 66건, 일본인 폭행은 80건, 조선인 경찰 폭행은 111건, 조선인 폭행은 169건이라고 한다.<ref> {{뉴스 인용
|제목 = 53년만의 증언, 친일경찰 노덕술
|url = http://www.imbc.com/broad/tv/culture/cantell/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459100052100000&pagesize=15&pagenum=4&cornerFlag=0&ContentTypeID=1
|출판사 = [[문화방송]]
|저자 =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쪽 =
|작성일자 = 2002년 3월 10일
|확인일자 = }} </ref>
 
* 서용화 교수는 "생전에 해방 직후 대한민청으로 우익활동을 한 것은 아버지 [[김좌진]] 장군이 공산당으로부터 암살당했다고 굳게 믿고 있었기 때문이었다는 심정을 토로한 적이 있다. 김두한 의원이 과도한 [[반공]] 활동으로 일반에 다소 부정적 이미지가 형성된 것은 사실이지만 [[일제강점기]] 주먹의 힘으로 민족적·의협적인 행동을 한 것과 해방 후 노동운동과 함께 정파에 휘둘리지 않고 정의감에 기반을 둔 정치활동을 한 부분은 높게 평가돼야 한다."라고 말했다.<ref name="강원도민일보"/>
 
== 뜬소문 ==
[[역사문제연구소]]는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역비의책 15) 이란 통해 말했다.
{{인용문|(전략) 제가 일제시대 때 신문을 뒤적이다가 [[조선일보]]에서 보았는데 날짜는 정확히 기억하지 못하겠습니다만, 김두한 때문에 종로시장이 철시(撤市)한 기사가 나옵니다. (중략) 김구 선생이라면 우익 민족주의자였죠. 일제 치하 전체를 반공투쟁으로 일관했던 분인데요, 그렇게 반공투쟁에 철저했던 분이기 때문에 어느 누구도 김구 선생을 좌익으로 몰 수는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김구 선생이 민족주의자가 아닌 것은 아닙니다. 그런 김구 선생이 김두한을 불러서 호부에 견자라고 노골적으로 충고하는 것이 백범어록에 나와있습니다.(후략)"<ref> {{뉴스 인용
|제목 = 인물로 보는 친일파 역사(역비의책 15)
|url =
|출판사 = [[역사문제연구소]]
|저자 = [[역사문제연구소]]
|쪽 = 168
|작성일자 = 2003년 4월 25일
|확인일자 = }} </ref>}}
 
그러나 [[서울 종로구]]에서 [[1916년]]부터 3대 걸쳐 가장 오랫동안 양복점을 운영한 이경주는 "김두한 씨도 우리 가게 단골이었지요. 다른 곳 불량배나 일본 주먹패로부터 종로의 한국 상인들을 보호했다고 들었어요. 20여년간 우리 가게에서 양복을 해 입었다고 하더군요."라며 "맞춘 양복을 입고 다니시다가 불쌍한 사람이 있으면 벗어주거나 전당포에 가서 옷을 맡기고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는 얘기를 들었어요."라며 아주 멋쟁이셨죠. 그리고 몸이 아주 단단하시고 남자답게 생기셨죠. 또 자신이 어렵게 컸기 때문에 어려운 사람을 많이 도와주었다고 하더라고요."라고 말했다.
[[서울 종로구]]에서 이발관을 운영한 이상희는 [[야인시대]]를 보며 실제와 드라마가 똑같다고 느낀 점은 시장 [[상인]]들이 김두한을 대하는 태도. 김두한은 상인들로부터의 존경과 지지가 대단했으며, 종로 거리를 걸을 때는 마주치는 거의 모든 사람들이 공손하게 인사를 건넸다고 말했다.<ref name="이발사"/><ref name="CBS">{{뉴스 인용|url=http://www.cbs.co.kr/Nocut/Show.asp?IDX=679593 |제목= 양복감·재봉틀 짊어지고 피난 가서도 가게 열었죠" |발행일자= 2003년 9월 1일 |출판사= [[노컷뉴스]] |확인일자= }}</ref><ref name="이경주 사장">{{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0&aid=0000171676 |제목= (외곬)3대째 외길 서울 '종로양복점' 이경주사장 |발행일자= 2003년 1월 5일 |출판사= [[동아일보]]|확인일자= }}</ref> 한편, 김두한 때문에 종로시장이 철시(撤市)한 기사라는 내용은 [[2002년]] [[10월 18일]] PD저널에 기고한 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박한용이 한 말이다.<ref> {{뉴스 인용
|제목 = 특별기고
|url = http://www.pdjournal.com/news/quickViewArticleView.html?idxno=4590
|출판사 = PD저널
|저자 =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상임연구원
|쪽 =
|작성일자 = 2002년 10월 18일
|확인일자 = }} </ref>
 
백범어록은 물론 [[백범일지]]에도 관련 내용은 없다. 하지만 [[백범일지]]에 변절한 [[안중근]]의 차남 [[안준생]]에 대해 “민족 반역자로 변절한 안준생을 체포해 교수형에 처하라고 중국 관헌에게 부탁했으나 그들이 실행치 않았다.”(‘백범일지’ 619항/ 너머북스 펴냄) 라는 내용이 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다산칼럼) 김구와 안중근 집안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15&aid=0000821008
|출판사 = [[한국경제]]
|저자 = 박 성 래 < 한국외대 명예교수·과학사>
|쪽 =
|작성일자 = 2005년 7월 24일
|확인일자 = }} </ref> 안중근 의거 100주년(2009년)을 맞아 국내 학계, 언론이 다각도로 재조명했지만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다뤄지지 않았다. 다만 [[연합뉴스]]가 ‘안중근 의거 100년 살아남은 자의 슬픔’(2009년 11월 1일자)이라는 제목으로 “안준생의 친일행적은 적어도 학계에서는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국내 어느 연구자도 이런 사실을 지적하지 않는다. 그만큼 안 의사가 갖는 영웅성이 절대적이기 때문일 것”이라는 분석이 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안중근은 쏘고, 아들 준생은 사죄하다
|url = http://weekly.donga.com/docs/magazine/weekly/2010/03/23/201003230500030/201003230500030_4.html
|출판사 = [[주간동아]]
|저자 = 이종각
|쪽 =
|작성일자 = 2010년 3월 30일 729호(p66~69)
|확인일자 = }} </ref> 실제로 안준생의 관련은 이토 히로부미 안중근을 쏘다라는 책이 출판 이후 진보, 보수 언론에서 기사화되기도 했다.<ref>[http://news.search.naver.com/search.naver?ie=utf8&se=0&mobile=0&tx=&where=news&se=0&mobile=0&query=%EC%95%88%EC%A4%80%EC%83%9D+%EA%B9%80%EA%B5%AC&sm=tab_pge&sort=0&photo=0&field=0&reporter_article=&pd=0&ds=1998.01.01&de=2010.05.21&sim=0&docid=&detail_and_query=&detail_not_query=&detail_or_query=&detail_udp_query=&start=11 안준생 관련 기사들]</ref>
 
{{인용문|(전략)일설에는 이범석이 너희 아버지를 죽인 자는 공산주의다 하니까 그때부터 이를 북북 갈면서 우익이 됐다는 소문도 있습니다만, 그것은 알 수 없어요. 아무튼 김두한은 1945년 10월 이후 우익 쪽의 청년단, 즉 윤보선, 유진산 등이 중심이 된 청년단에서 활동하면서,(하략)
<ref> {{뉴스 인용
|제목 = 인물로 보는 항일무장투쟁사
|url =
|출판사 = [[역사문제연구소]]
|저자 = [[역사문제연구소]]
|쪽 = 19
|작성일자 = 1995년 3월 15일
|확인일자 = }} </ref>}}
 
그러나 [[2010년]] [[7월 5일]] 역사문제연구소는 다음 내용은 대중 강연 내용을 간추려서 논문 작성과 같이 정확한 전거를 제시하면서 서술된 것이 아니라 강연주제를 이끌어가는 과정에서 여러 설이나 자신의 경험 등이 언급되었다는 점이라고 말했다.<ref>[http://ko.wikipedia.org/wiki/%ED%86%A0%EB%A1%A0:%EA%B9%80%EA%B5%AC#.EC.97.AD.EC.82.AC.EB.AC.B8.EC.A0.9C.EC.97.B0.EA.B5.AC.EC.86.8C_.EB.8B.B5.EB.B3.80 위키백과 토론:김구#]역사문제연구소 답변]</ref> 그리고 [[대한민주청년동맹]]은 [[윤보선]]이 아닌 명예회장에 [[김구]], [[이승만]], [[김규식]] 회장에 [[유진산]] 감찰부장 겸 별동대 총대장에 김두한으로 결성된 우익 청년단체이다.
[[김춘삼]]은 자신의 자서전 《나는 왕이로소이다》에서 "이후 춘삼은 남대문 일대를 점령하며, 김두한을 만나 동생으로 삼고 함께 일인의 악행에 맞서 정의를 행하게 된다."<ref>[http://www.imbc.com/drama/boss/total_1_03.html 드라마 왕초 공식홈페이지 거지왕 김춘삼]</ref><ref>드라마 [[왕초 (드라마)|왕초]]에서는 친구로 수정되기도 했다.</ref>라고 말하며 자신과 김두한의 관계에 대해 말했다. 그러나 김춘삼은 [[1928년]]생으로 김두한과 10살이라는 시대차이가 있으며, 김두한과 김춘삼 간의 인연에 관한 기록은 알려진 바 없다. 한편 [[드라마]] [[왕초 (드라마)|왕초]]의 방송 종영 이후 [[조세형]]의 하나의 기사만 기사화되기도 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대도 조세형, 나도 한때는 거지왕
|url = http://www.ilyosisa.co.kr/ILYO/183/html/Social/soc_1834401.html
|출판사 = 일요시사
|저자 = 김현준 기자
|쪽 =
|작성일자 = 1999년 7월 18일 제 183 호
|확인일자 = }} </ref>
 
김용옥은 [[1991년]] 자신의 책 《도올세설》에서 김두한에 대해 말했다.
 
{{인용문|내가 김두한에 관해 출간된 모든 정보를 대강 훌터 보고 난후에 내린 하드팩트(hard facts)의 핵심은 다음과 같다.
 
(중략) 다시 말해서 그가 장차구 다리 밑의 거지에서 종로 일대를 제패하는 깡패두목이 되기까지의 과정은 그가 김좌진의 아들이라는 픽션과는 전혀 무관한 사태이며, 김두한 자신에게도 의식된 족보의 사실일수가 없으며, 오로지 싸움꾼의 실력, 그야말로 적나라한 실력하나로 주먹계의 패자가 된 인물이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도올세설
|url =
|출판사 = 통나무
|저자 = 김용옥 지음
|쪽 =
|작성일자 = 1991년 3월 1일 [[ISBN]] 13-9788982640421
|확인일자 = }} </ref>}}
 
그러나 [[김을동]] 의원 비서실에 의하면 김용옥은 후에 김을동의원에게 자신의 허위사실 공표를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했다고 한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인용문
|우선, 이렇게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드립니다.
<br/>
하지만, 이같은 주장은 모두 사실이 아닌, 잘못된 정보임을 공식적으로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br/>
참고로 지금 김을동의원실 차원에서 법적 소송을 준비 중입니다.
<br/>
그동안 위와 같은 주장을 하면서, 김좌진장군과 김두한의원, 그리고 김을동의원까지 인격을 모독하고 명예를 훼손한 일들이 많았음에도 김을동의원께서 일일이 대응하지 않은 이유는 대꾸할 가치가 없기 때문이었습니다.
<br/>
이같은 주장을 했던 사람 중에 한 분인 도올 김용옥선생도 후에 김을동의원께 자신의 허위사실 공표를 인정하고 공식적인 사과를 했음을 분명히 말씀드립니다.
<br/>
여의도 국회의원회관에 있는 김을동의원실에 오시면 김좌진장군의 모친을 비롯하여 장군의 부인 오숙근여사, 김두한의원의 부인 이재희여사와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 김을동의원 이렇게 4대가 오붓하게 처마 밑 마루에 앉아 오붓하게 함께 찍은 오래된 흑백사진을 보실 수 있습니다.
<br/>
이 사진 한장만으로도 위의 주장은 모두 거짓된 것임을 아실 수 있으실 것입니다.
<br/>
궁금하시면 언제든 의원실로 찾아 오십시오.
<br/>
4대에 걸친 가족사는 100년이 넘는 긴 세월입니다. 제3자가 사실관계를 확인하지도 않고 단지 추론과 정황만으로 대한민국의 위인과 그 자손들을 욕되게 하면 안될 것입니다.
<br/>
어찌보면, 인터넷의 또다른 폐해일지도 모르겠네요. 소위 '카더라~'통신 말입니다.
<br/>
궁금해 하신 선생님의 궁금증을 푸는데 도움이 되셨으면 합니다. 더 궁금한 것이 있으면 언제든지 의원실로 연락주십시오.
<br/>
감사합니다.</br><ref> {{뉴스 인용 | 제목 = 김두한은 김좌진의 아들이 아니라는데...라는 제목으로 어느 누리꾼이 남긴 글에 답변.| url = http://www.kimeuldong.com/sub04/sub04_3.asp | 출판사 = 김을동 의원 홈페이지 | 저자 = 김을동 의원 비서실| 작성일자 = 2009/08/04}} </ref>
|김을동의원실 2009/08/04}}
<ref>[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5&aid=0000260190 김민호 기자 ‘주몽’ 단역체험… 연기 열정·자부심 없인 힘들어요] [[국민일보]] 2006-10-20 작성</ref><ref>[http://lady.khan.co.kr/khlady.html?mode=view&code=5&artid=201009061050221&pt=nv 고운 미소가 따뜻한 ‘국민 어머니’ 강부자] [[경향신문|레이디 경향]] 2010년 9월호</ref>
 
[[백기완]]은 자서전, 강연과 그리고 [[2003년]]《백기완의 통일이야기》, [[2008년]]과 [[2010년]] [[한겨레]] 등 언론을 통해서 10대 당시 가대기라는 정체불명에 인물과 김두한에 대한 일화를 말했다.</br> <ref name="오마이뉴스">{{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47&aid=0000014266|제목=<장군의 아들>과 '야인시대', 그리고 '성웅 김두한' |발행일자= 2002-10-16 |출판사= [[오마이뉴스]] |확인일자=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길을찾아서) 김두한 메다꽂은 언니야 / 백기완
|url = 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16147.html
|출판사 = [[한겨레]]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8년 10월 15일
|확인일자 = }}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백기완의 통일 이야기
|url =
|출판사 = 청년사
|저자 = 백기완
|쪽 = 61
|작성일자 = 2003년 1월 6일
|확인일자 = }}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한홍구-서해성의 직설) “임마 부딪쳐 깨져! 꾸지람도 내가 끝이야”
|url = http://www.hani.co.kr/arti/opinion/column/442744.html
|출판사 = [[한겨레]]
|저자 = [[서해성]], [[한홍구]], 백기완
|쪽 =
|작성일자 = 2010년 10월 7일
|확인일자 = }} </ref>
 
그러나 [[1996년]] [[고은]]은 백기완이 20대 당시 김두한을 제압했다는 쌍도끼라는 어깨 노릇을 했다는 일화<ref> {{뉴스 인용
|제목 = 나의 山河(산하) 나의 삶 <188>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6012800329111001&editNo=40&printCount=1&publishDate=1996-01-28&officeId=00032&pageNo=11&printNo=15666&publishType=00010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고은]]
|쪽 =
|작성일자 = 1996년 1월 28일 11면
|확인일자 = }}</ref>와 백기완과 일명 방배추로 불리는 방동규라는 인물에 일화와 비슷한 등 그때그때 상황이 달라지기도 하며<ref> {{뉴스 인용
|제목 = ‘배추’ 방동규 “요즘세상 의리가 없어 서운해”
|url = http://news.khan.co.kr/section/khan_art_view.html?mode=view&artid=200812110930145&code=900315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이지선기자
|쪽 =
|작성일자 = 2008년 12월 11일
|확인일자 = }} </ref> 방동규(일명 방배추)는 시라소니 이후 최고 주먹이라는 별명으로 불린다고 하는데, 이 별명을 지어준 인물은 작가 [[황석영]]이라고 한다. [[황석영]], 백기완, 방배추 등 이들은 친구관계이기도 하다.<ref>[[전설의 시대]] [http://www.obs.co.kr/perprogram/ProgramMain.aspx?pgmid=C090400005# 시라소니 이후 최고의 주먹 방배추가 평생 딱 세 번 져서 전설] [[OBS]] 2009년 6월 11일 방송</ref>
 
[[고은]]의 자선적 소설에서 말하는 20대 시절에 시대배경은 좌우대립이 극심하던 해방정국 당시로 [[박헌영]]의 비서출신이었던 [[박갑동]]은 [[조선공산당]]의 산하 조선청년전위대의 전위대장으로 있을 때 민족진영에서, [[대한민청]] 당시에는 [[미 군정]]과 [[경찰]]에 잡히면 오히려 안심했다고 할 정도로 공포의 대상이었다고 말했으며 백기완이 말하는 가대기 일화에 자신이 10대 당시 시대배경은 [[1940년대]]로 마루오카라는 [[일본]]의 [[경찰]]과 결투로 잇폰({{llang|ja|いっぽん}})이라는 불리게 된 점과 [[선우영빈|하야시]]라는 야쿠자와 [[장충단 공원]]에서 결투 이후로 이른바 주먹 황제로 명성을 떨친 시기로, 가대기 일화를 전하는 언론(동네 상인들을 못살게 굴던 김두한을 맞짱<ref name="오마이뉴스"/>)에서 강조하는듯한 문장과 [[1940년대]]에서 [[한국 전쟁]]이 발발하기 전 1950년 이전의 김두한의 행적, 인물평과 백기완의 가대기 일화를 전하는 언론에서 보았을 때, 이는 거짓으로 보인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ref name="김동길"/><ref name="정준의원">{{뉴스 인용|url=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061700329109004&editNo=15&printCount=1&publishDate=1992-06-17&officeId=00032&pageNo=9&printNo=14438&publishType=00010 |제목= 3代(대) 民議員(민의원)당선 기념 |발행일자= 1992년 6월 17일 9면 |출판사= [[경향신문]] |확인일자= }}</ref> <ref name="이발사"/><ref name="강원도민일보"/><ref>인물현대사 [http://www.kbs.co.kr/end_program/1tv/sisa/manhistory/vod/1264316_968.html 각하가 곧 국가다 - 차지철] [[KBS]] 2003년 10월 31일 방송</ref><ref name="CBS"/><ref name="용봉산"/><ref name="이경주 사장"/><ref name="삼통사"/><ref name="홍성지역사"/><ref name="백만불미스터리"/><ref> {{뉴스 인용
|제목 = (새연재 한상진 기자의 ‘藝人’ 탐구) 영화배우 김희라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262&aid=0000003953
|출판사 = [[신동아]]
|저자 = 한상진 기자
|쪽 =
|작성일자 = 2010년 10월 25일
|확인일자 = }} </ref>
 
[[2003년]] [[3월 21일]], [[민언련]]은 2003년 2월 이달의 좋은 방송·나쁜 방송 통해 [[드라마]] [[야인시대]]의 대해 말했다.<ref>[http://www.ccdm.or.kr/board/mboard.asp?Action=view&strBoardID=broadcast&intPage=1&intCategory=0&strSearchCategory=|s_name|s_subject|s_content|&strSearchWord=%BE%DF%C0%CE%BD%C3%B4%EB&intSeq=32592 2003년 2월 이 달의 좋은 방송·나쁜 방송(2003.3.21)] [[민언련]]</ref><ref>[http://www.ccdm.or.kr/board/mboard.asp?Action=list&strBoardID=broadcast&intPage=1&intCategory=0&strSearchCategory=|s_name|s_subject|s_content|&strSearchWord=%BE%DF%C0%CE%BD%C3%B4%EB 방송모니터위원회 모니터 보고서] [[민언련]]</ref> 그러나 [[일제 강점기]]에는 [[이기동 (1885년)|이기동]]과 [[박춘금]]이며<ref> {{뉴스 인용
|제목 = ‘정치깡패 원조’ 박춘금
|url = http://www.saramilbo.com/sub_read.html?uid=3145&section=sectio&section2=
|출판사 = [[사람일보]]
|저자 = 방학진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5년 3월 26일
|확인일자 = }} </ref><ref>실제로 사람일보에서 기사화 박춘금 기사 이전에는 박춘금에 대해 언급이 없었으며, 1999년 [[MBC]] 한국 100년 우리는 이렇게 살았다. 깡패와 건달로본 100년에서는 [[이성순]]은 1913년생, [[이정재]]는 1918년생으로 나오는 등 급조로 제작되기도 했다.</ref>,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에는 조직을 체계적으로 조직한 [[이정재]], [[임화수]]이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역사 속의 인물)‘정치깡패 1호’ 이정재
|url = http://www.imaeil.com/sub_news/sub_news_view.php?news_id=45294&yy=2009
|출판사 = [[매일신문]]
|저자 = 정경훈 논설위원
|쪽 =
|작성일자 = 2009년 10월 19일
|확인일자 = }} </ref> 해방정국에서 우익활동 당시 민간인이라는 등 제삼자관계라고 말하고 있으나 제삼자 관계와는 연관이 없으며, 최동열 역은 [[만해 한용운]]의 제자, [[시대일보]], [[중외일보]], [[조선중앙일보]] 등의 소속 [[사민주의]]성향의 중도 역할이며 좌우대립 과정과 그리고 [[좌우합작]] 방해. [[여운형]] 납치 등 비판적으로 다루었으며 [[김성수 (1891년)|김성수]]의 친일설은 [[반민족행위처벌법]]이 [[이승만 정부]]에 의해 해체되기 전 처벌과 판결을 받지 않았으며, [[김성수 (1891년)|김성수]] 친일설의 반론 중 대필이라는 증언<ref>실제로 [[일제 강점기]]말에는 [[여운형]], [[조만식]] 등 인물들은 이름을 도용당하는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ref> 등 현재도 논란에 있다. [[반동]]이란 대사를 제외하고 [[빨갱이]]이란 대사를 극 중 좌파 세력을 악의 축이라고 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한국의 군정기]] 당시 [[빨갱이]], [[반동]]으로 불렸다. 폭력을 미화하지 하지 않았으며 주요 사건을 해설로 설명할 때는 중립적으로 처리하는 등 [[이정재]]와 [[김기홍]]이 결별할 때 모종의 일로 결별했다는 설이 있지만 알 수 없다는 내용이나 [[이성순]] 린치 사건 때는 해설로 이런 이런 설이 전해진다거나 설이 있는 내용에 대해서는 따로 해설을 통해 관련 소개하기도 했다. 극 중에서 여성상을 왜곡한다고 말하고 있으나 실제로 김두한은 여성에게 인기가 많았다고 하며 1부(1~50회)에서 왜곡을 했다며 정작 어느 부분이 왜곡인지 설명이 없으며 또한 2부(51~124)에서는 시청률이 하락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시청률 평균 30%대로 유지했는데 이는 역대 드라마 중 낮은 수치의 시청률이 아니며 [[용의 눈물]]은 평균 시청률 27.1%,<ref> {{뉴스 인용
|제목 = (방송)왜 사극이 뜰까? '여인천하' '태조왕건' 등 인기
|url = http://www.donga.com/fbin/output?n=200106130346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권재현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1년 6월 13일
|확인일자 = }} </ref> [[태조 왕건 (드라마)]]는 평균 39.2%,<ref> {{뉴스 인용
|제목 = 올 시청률 1위 KBS ‘태조왕건’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1&aid=0000012242
|출판사 = [[문화일보]]
|저자 = 이영희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2년 12월 16일
|확인일자 = }} </ref> [[서울 1945]]는 10%대 기록하였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서울 1945' 시청률 16.1%로 종영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01&aid=0001407553
|출판사 = [[연합뉴스]]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6년 9월 11일
|확인일자 = }} </ref> 한편, 시청률을 위해 시라소니와 김두한의 결투장면을 넣으려고 한다고 말하지만, 사실과 다르다.<ref> {{뉴스 인용
|제목 = (문화칼럼)이환경/궁예의 최후와 일본 역사왜곡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0&oid=020&aid=0000062999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이환경 작가
|쪽 =
|작성일자 = 2001년 5월 9일
|확인일자 = }}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야인시대' 이환경씨 "김두한 짝사랑 드라마로 고백"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20&aid=0000147796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김갑식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2년 8월 26일
|확인일자 = }}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드라마는 역사 왜곡에 대한 무기"
|url = http://www.busanilbo.com/news2000/html/2006/1103/0B0020061103.1029115523.html
|출판사 = [[부산일보]]
|저자 = 임성원 기자
|쪽 =
|작성일자 = 2006년 11월 3일
|확인일자 = }} </ref>
 
일본학과 [[강창일]] 배제대학교 교수는 [[도야마 미쓰루 ]] 등 [[일본 제국|일본]]의 우익은 경성이나 만주 등 여러 곳에 [[낭인]](야쿠자) 등을 파견하여 선봉장 역할을 하게 됐다고 말했는데, [[선우영빈|하야시]]([[선우영빈]])는 [[일본]]에서 [[도야마 미쓰루]]의 눈에 띄어 발탁되었으며 30년대 지금의 명동인 [[명치정]]으로 왔다. 그러나 [[선우영빈|하야시]]는 [[도야마 미쓰루]]와 같은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이나, 이들의 앞잡이 역할을 하던 다른 친일파들과는 상반된 활동을 펼쳐나가는 등 선우 종친회와 조선인들에게 신망이 두터웠다고 한다.<ref>[http://sports.chosun.com/news/life/200210/20021012/2al29004.htm "하야시는 조선인 협객이었다"] 스포츠조선 2002년 10월 11일 작성</ref><ref>깜짝! 스토리랜드 [http://tv.sbs.co.kr/collection/tp1_review_detail.jsp?vVodId=V0000224831&vVodCnt1=00021&vVodCnt2=00 하야시는 조선인이었다.] [[SBS]] 2002년 12월 22일 방송</ref> 그리고 [[선우영빈|하야시]]가 광복 이후 김두한에게 일본도 등을 주며 일본으로 돌아갔다고 말하고 있으나 하야시는 [[1945년]] [[8·15 광복]]이 되자 부인과 부하들만 [[일본]]으로 보냈고 이후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친일파]]의 청산을 위해 [[반민족행위처벌법]]이 구성되자 친일혐의로 1년 6개월형을 선고받았다.<ref> {{뉴스 인용
|제목 = 김두한 자서전2
|url =
|출판사 = 메트로서울홀딩스
|저자 =
|쪽 = 부록 언론이 말하는 주변 인물 261
|작성일자 = 2003년 1월 15일
|확인일자 = }} </ref> 한편 [[한일 병합 조약]] 등은 [[이완용]] 등 조선인 친일파들이 주도했으며 [[유림]]의 아들 [[유원식 (군인)|유원식]] 또한 [[만주군]]이었으며 [[간도특설대]] 등은 조선인으로 구성된 일본군 부대이다.
 
[[김좌진]]이 공산주의자에게 암살당한 사실은 일제강점기에도 알 만한 사람은 다 아는 일이었는데 그 아들인 김두한만 몰랐다는 것은 믿기지 않는다. 라고 말하고 있지만 [[김좌진]]의 죽음은 현재도 일부 공산 진영에서는 양환준의 증언자료로 친일행위로 암살되었다고 주장하기도 하다. 그러나 김좌진의 친일설은 [[1923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독립신문]]에서 공표하기도 했으며<ref>[http://ko.wikipedia.org/wiki/%EA%B9%80%EC%A2%8C%EC%A7%84 위키백과 김좌진]</ref> [[만주]] 등에서 좌우대립이 극심했으나 주로 주적은 [[일본제국]]이며 또한, 현재의 [[대학생]] 중 [[5.18 민주화 운동]], [[8·15 광복]] 등은 모르기도 한다.<ref>[[PD수첩]] [http://www.imbc.com/broad/tv/culture/pd/vod/index.html?kind=text&progCode=1000836100320100000&pagesize=15&pagenum=4&cornerFlag=1&ContentTypeID=1 화려한 휴가, 그 못다한 이야기'][[MBC]] 739회 2007년 9월 4일 방송</ref>
재판 중에 울먹이며 부친의 훈장을 반납하겠다고 하기도 하고 자해를 시도하는 등 옥중에서도 끊임없이 뉴스를 만들다가 3개월여 만인 1966년 12월22일 병보석으로 출감했다고 말하고 있으나 당시 기사 등 자료에는 그런 자료는 없으며 재판 중에 울먹거렸다는 부분은 [[4.19혁명]] 이후 재판정에서 내내 울먹이던 임화수, 그리고 행동으로 방청객은 물론 변호인도 웃고 같이 재판받던 인물들도 쓴웃음을 짓는 등 재판정 자료와 비슷하다.<ref> {{뉴스 인용
|제목 = 풀죽은『보스』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0071000209103015&edtNo=2&printCount=1&publishDate=1960-07-10&officeId=00020&pageNo=3&printNo=11783&publishType=00010
|출판사 = [[동아일보]]
|저자 =
|쪽 =
|작성일자 = 1960년 7월 10일
|확인일자 = }}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林和秀(임화수),발뺌에 울먹 울먹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1080100329102006&editNo=3&printCount=1&publishDate=1961-08-01&officeId=00032&pageNo=2&printNo=4788&publishType=00010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쪽 =
|작성일자 = 1961년 8월 1일
|확인일자 = }} </ref> 자해는 배에 칼로 가른 관련을 말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배에 칼로 가른 관련은 [[국회 오물투척사건]]의 배후설에 대해 배후수사 거부로 한 것이다.<ref> {{뉴스 인용
|제목 = 割腹未遂(할복미수)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10800329203022&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11-08&officeId=00032&pageNo=3&printNo=6483&publishType=00020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쪽 =
|작성일자 = 1966년 11월 8일
|확인일자 = }}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野(야),集會妨害(집회방해)사건 추궁
|url = 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66111500329201015&editNo=2&printCount=1&publishDate=1966-11-15&officeId=00032&pageNo=1&printNo=6489&publishType=00020
|출판사 = [[경향신문]]
|저자 =
|쪽 =
|작성일자 = 1966년 11월 15일
|확인일자 = }} </ref> 실제로 [[국회 오물투척사건]]의 배후설은 [[이만섭]]에 의해 [[김형욱]], [[이후락]] 등 [[제3공화국|박정희 정부]]의 공작이라는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JP지시로 의사당 오물투척" 모략 김두한의원 중정끌려가 모진 고초
|url = http://www4.hankooki.com/lpage/special/200208/se200208010829534670.htm
|출판사 = 한국아이닷컴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2년 08월 1일
|확인일자 = }} </ref> 한편, [[국회 오물투척사건]] 배후설은 진보 단체에서는 귀가 얇다는 식으로 재각색되어 유포되기도 했다.<ref>시사저널 기사 참고</ref> [[국회 오물투척사건]] 이후 병보석은 김두한은 평소 정상적 [[혈압]]이었다고 전해지며 옥중에서 [[소금]]을 섭취하여 [[혈압]]을 올리는 방법으로 병보석된 것이라고 한다.<ref name="백만불미스터리"/>
 
[[김동회]]는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비중을 차지하며 1939년에 김두한을 만나 평생지기라며 김두한과 있었던 일화들을 소개하는 등 언론 통해서 인터뷰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김두한은 싸움천재…순간 머리회전 빨라"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6&oid=038&aid=0000155522
|출판사 = [[한국일보]]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2년 10월 9일
|확인일자 = }} </ref> 그러나 김동회가 김두한과 동지라는 확인하는 자료는 알려지지 않고 있으며 반대로 김동회가 말한 내용에 대해 틀린 점이 있기도 하는데, 김동회는 1946년에 김두한과 같이 아편사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았다고 말하지만, 김두한의 사형선고는 1946년 아편사건이 아닌 [[정진영 (사회주의 운동가)|정진영]] 등의 살해사건인 1947년에 이른바 대한민청 사건이며 당시 대한민청 사건 보도기사 등 자료에는 김동회란 이름은 없다.</ref><ref name="공보부">{{뉴스 인용|url= |제목= 공보부, 군률재판에서 김두한에 사형언도 발표 |발행일자= 1948년 3월 16일 |출판사= [[동아일보]] |확인일자= }}</ref>
 
김동회는 [[드라마]] 《[[야인시대]]》에 평양박치기는 [[이성순|시라소니]]이고 [[선우영빈|하야시]]([[선우영빈]])가 일본인으로 묘사하고 김영태가 해방 후 만난 인물이라고 말하지만 시라소니가 [[이성순]]의 별호이며<ref>[http://www.sirasoni.org/m1/s1.php 시라소니]</ref> [[선우영빈|하야시]]([[선우영빈]])를 일본인으로 묘사하지 않았으며 김영태는 해방 전인 1940년 초이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야인시대’ 김영태 뉴저지 산다
|url = http://www.koreadaily.com/news/read.asp?art_id=204681
|출판사 = 뉴욕 중앙일보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2년 12월 22일
|확인일자 = }} </ref><ref> {{뉴스 인용
|제목 = ‘야인시대’실존인물 김영태옹 김을동씨와 30년만에 재회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013355
|출판사 = [[문화일보]]
|저자 =
|쪽 =
|작성일자 = 2002년 12월 24일
|확인일자 = }} </ref> 또한, 김동회 관한 언론기사와 김영태 관한 언론기사에 각각 평생지기라는 타이틀로 기사화되기도 했으나 김영태와 활동한 자료는 있으나 김동회가 김두한과 인연이 있다는 자료는 확인되지 않는다.<ref>[http://www.kimeuldong.com/images/sub07/img_21.gif 나의 가족 김두한/건국활동 김두한과 김영태 활동 사진] [[김을동]] 의원 홈페이지</ref> 한편, 영화 장군의 아들에서 비중을 차지하며 김두한을 키웠다는 김기환에 대한 행적 및 실존인물인지는 [[홍성유]]의 장군의 아들(전 인생극장) 소설책 출처와 김동회와 [[조일환]] 등의 측에 주장으로서 확인은 되지 않는다.
[[2006년]] [[11월 22일]]자 연합뉴스의 기사<ref name="2006연합뉴스">{{뉴스 인용|url=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01&aid=0001474909 |제목=<'장군의 외손녀' 1년 지나도록 국적회복 못해>(종합) |발행일자= 2006년 11월 22일 |출판사= [[연합뉴스]] |확인일자= }}</ref>내용을 [[2008년]] [[7월 22일]] 새벽 3시 26분에 [[다음 아고라]]에서 한 [[누리꾼]]의 글을 시작으로 [[2008년]] [[7월 28일]]에 김을동 [[유전자]] 거부설이 유포되기도 했다.<ref>[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717789 아까 김을동씨와 김두한, 김좌진장군에 대해서 물으셨지요?] [[다음 아고라]] 2008년 7월 22일 작성 (유전자설 최초 글)</ref><ref>[http://bbs1.agora.media.daum.net/gaia/do/debate/read?bbsId=D003&articleId=1753814 2008년 7월 28일 유전자설][[다음 아고라]] 2008년 7월 28일 작성</ref> <ref>[http://dna.naver.com/viewer/index.nhn?articleId=1992112900209122004&edtNo=3&printCount=1&publishDate=1992-11-29&officeId=00020&pageNo=22&printNo=22014&publishType=00010 어려운 이웃과 함께한「가시밭길 삶」]1992년 11월 29일 작성 [[동아일보]]</ref><ref>[http://dbs.donga.com/comm/view.php?r_id=00157&r_serial=01 동아방송 노변야화방송] [[동아방송]] 1969년 10월 14일 방송.</ref><ref name="2006연합뉴스"/>
 
== 사후 기타 사건 ==
후계자의 사칭 하며 횡포를 부리는 사건이 발생하기도벌어지기도 하였다했다.<ref> {{뉴스 인용
|제목 = (세상만사-나라안) 김두한 후계자 사칭 술값 안내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2&oid=021&aid=0000153144
줄 586 ⟶ 919:
**** [[송송이]] : 외손녀
** 김부미 : 2번째 부인
*** [[김경민 (언론인)|김경민]] : 아들
*** 김영채 : 딸
*** 김현성 : 아들
줄 594 ⟶ 927:
*** 김주택 : 아들
 
== 문화 속에 나타난 김두한 ==
== 신념 ==
무산대중 (無産大衆)<ref name="연작 에세이"/>
 
== 문화속 김두한 ==
=== 드라마 ===
* [[김영인 (1940년)|김영인]] - [[1989년]] 《[[무풍지대]]》 [[KBS]] 드라마
줄 606 ⟶ 936:
 
=== 영화 ===
* [[장동휘]] - 《팔도사나이》(1969년)<ref> {{뉴스 인용
|제목 = 故허장강, 자기만의 색깔로 기억된 최초의 배우
|url = http://star.mt.co.kr/view/stview.php?no=2008082708024428039&type=1&outlink=1
줄 616 ⟶ 946:
* [[이대근]] - 《실록 김두한》 (1974년)
* [[박상민 (배우)|박상민]] - 《[[장군의 아들]]》 (1990년)
 
=== 소설 ===
* [[홍성유]] - 《인생극장》 (1985년)<ref>[[조선일보]]에 연재됐다가 뒤에 "장군의 아들"(8권)로 제목이 바뀌어 발간되었다.</ref>
 
=== 만화 ===
* [[김창호]] - 《풍운아 김두한》(1970년대)
* [[김창호]] - 《소년 김두한》 (1970년대)
* 《잇뽕전》 (2009년) <ref> {{뉴스 인용
|제목 = 제5회 웹애니메이션 페스티벌 최종선정작 발표
줄 631 ⟶ 962:
|확인일자 = }} </ref>
 
=== 음반노래 ===
* [[타카피]](TACOPY) - 《김두한》 (2002년)<ref> {{뉴스 인용
|제목 = 타카피의 '김두한', 경쾌한 리듬 인기
|url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001&oid=038&aid=0000151522
줄 651 ⟶ 982:
* [[조병옥]]
* [[신익희]]
* [[지청천]]
{{col-4}}
* [[장택상]]
줄 656 ⟶ 988:
* [[조선공산당]]
* [[신불출]]
* [[중앙정보부]]
* [[박정희]]
* [[민관식]]
{{col-4}}
* [[김영삼]]
* [[이성순]]
* [[김승호]]
{{col-4}}
* [[여운형]]
* [[김규식]]
* [[염동진]]
* [[우미관]]
줄 668 ⟶ 1,000:
* [[수표교]]
* [[장충단 공원]]
{{col-4}}
* [[정진영 (사회주의 운동가)|정진영]]
{{col-4}}
* [[이정재 (1917년)|이정재]]
* [[이범석 (1900년)|이범석]]
* [[지청천]]
* [[이성순]]
* [[이정재 (1917년)|이정재]]
* [[이규갑]]
* [[존 하지]]
* [[한독당 내란음모사건]]
* [[이후락]]
* [[박정희]]
{{col-end}}
 
줄 684 ⟶ 1,016:
== 바깥 고리==
* {{헌정회|525|김두한}}
 
{{전임후임 국회의원|
|전임자 = (종로구 갑)[[박순천]]<br/> (종로구 을)[[오하영]]
줄 706 ⟶ 1,037:
[[분류:1918년 태어남]]
[[분류:1972년 죽음]]
[[분류:일제 강점기 사람]]
[[분류:범죄]]
[[분류:저격수]]
[[분류:육군 군인]]
줄 724 ⟶ 1,053:
[[분류:군정기]]
[[분류:안동 김씨]]
[[분류:사회민주주의자]]
[[분류:반공주의자]]
[[분류:제1공화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