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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버트 카플란]]은 밉살스런 저작 '[[타타르로 가는 길]]'에서 [[아르메니아인]]들의 '이란 공포증'에 대해 설을 풀었는데, 양국의 역사가 오랜 만큼 적대심도 깊다. [[아르메니아]]는 [[근대]]에 들어와 [[터키]]([[오스만 투르크]])에서도 숱하게 학살됐으니 슬픈 역사를 가진 민족이다. 하지만 [[사산조 페르시아|사산조]]는 [[파르티아]]에 대면 신분 이동이 제한되어 있었지만 [[기독교]]도가 특별히 박해받지는 않았다고 한다. [[아르메니아]]를 둘러싼 사산조와 [[로마 제국]]의 싸움은 역시나 '양대 [[제국]]의 패권 싸움'으로 봐야 할 것이다.
 
사산조의 수도는 [[바그다드]] 근처에 있는 [[크테시폰]]인데, 당시에 이미 200만 명의 인구를 자랑하던 대도시였다. 크테시폰은 바그다드의 건립자 [[아부 자파르 알 만수르알만수르]]([[압바스 왕조]]의 2대 [[칼리프]])에 의해 파괴됐고 크테시폰의 건축물들은 [[바그다드]]의 건축 자재로 이용됐다고 한다.
 
== 아랍족의 융성과 중세 이란 ==
이란 북동부에서 칭기즈의 후예 중 강성했던 [[티무르]]가 제국 건설에 나선다. 티무르는 1381년 이란을 침공하고, 북인도와 서역, 소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세웠다. 페르샤 천년 고도 [[시라즈]]와 [[이스파한]]은 다시 초토화됐다. 티무르 제국은 1405년 티무르 사후 급속히 쇠퇴했고, 1501년까지 간신히 명맥을 유지했다.
 
티무르 치하의 이란 북서부에는 [[사피 알 딘알딘]]이라는 이슬람 [[셰이크]](이슬람에는 원래 성직자 혹은 사제 개념이 없기 때문에 정확히 옮기기 힘들다)가 추종집단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당시 이단으로 배척받던 쉬아파들인 이들은 순니파의 탄압을 피해 은둔 생활을 해왔다. 1499년 이 집단의 지배권을 장악한 [[이스마일]]이 정복 전쟁을 일으킨다. 이스마일은 곧 이란 전역을 통일하고, 1501년 [[타브리즈]](Tabriz)를 수도로 [[사파비 왕조]](Safavid, 1501-1736)를 수립한다.
 
이로써 이란은 652년 아랍족 침입 이후 1,000년 만에 이민족의 지배를 벗어난다. 오랜 이민족 통치로 이란인들은 반외세 심리와 이방인에 대한 환대라는 상반되는 의식 구조를 갖게 됐다는 분석도 있고, 또 오랜 전제군주정과 외세 통치로 인해 절대 권력에 굴종하는 공포 심리가 체질화됐다는 분석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적어도 이란은 지리적인 틀에서 이란 고원이라는 땅 안에 언제나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슬람 학자들은 이란이 외세의 지배를 받기는 했지만 ‘결코 땅과 나라 이름을 잃은 적은 없었다.’라고 말한다.
[[테헤란 주재 미 대사관 인질 사건]](11.4)이 발생했다. 이 인질 사건으로 [[바자르간]]은 사임했다. [[1980년]] 1월 [[바니 사드르]](Bani Sadr)가 초대 대통령으로 당선됐지만 혁명 세력을 누르지 못했다. 사드르는 1년 만에 실각하고, [[무자헤딘]](MKO) 지도자 [[마수드 라자비]](Masoud Rajabi)와 함께 81년 7월 파리로 망명했다. 사드르는 [[파리 시|파리]]에서 호메이니 축출 운동을 전개했지만 이란의 권력 투쟁은 승패가 이미 정해져 있었다. 성직자 계급의 승리 이후 이란은 교조주의로 치닫는 동시에, 정정 불안과 암살이 횡행한다. 사드르 실각 뒤 취임한 [[알리 라자이]] 대통령과 [[자베드 바호나르]] 총리가 나란히 암살됐다. 혁명 위원회는 분쟁을 잠재우기 위해 저항 조직을 해체하고 3,000여명을 처형했다. [[1981년]]말 [[혁명]]은 초기의 불안 단계를 극복하고 제도적으로 완성되었다.
 
한편 이라크에서는 [[사담 후세인]]이 집권한다. [[이라크]]는 인구의 65%가 [[시아파]]이고, 시아파의 종주국은 이란이다. [[사담 후세인]]은 이란 혁명의 파고가 넘어올까 두려워 이란을 선제 공격하였다. 주변 아랍국가들의 명시적, 암묵적인 지지 속에 [[1980년]] 7월 [[이란-이라크 전쟁]]이 시작됐다. 이 전쟁의 표면적인 이유는 [[샤트 알 아랍샤트알아랍]](Shatt -al-Arab) 수로의 영유권 다툼이었다.
 
개전 후부터 [[1982년]] 여름까지는 이라크가 공격의 주도권을 잡았으나, [[1982년]]말부터 이란이 초기의 열세를 극복하고 반격에 나서면서 지리한 소모전에 돌입한다. [[미국]] 무기로 무장하고서도 미국의 이라크 지원 사격으로 고립 지경에 빠진 이란은 국민들의 '혁명 수호 의지'로 패전을 면할 수 있었지만 인명 피해는 이란 쪽이 훨씬 컸다. 그러나 외적의 침입으로 오히려 이란 내에서는 혁명 분위기가 공고해지는 효과가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