범유럽 피크닉: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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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89년 탈출 사건 ==
1989년 범유럽 피크닉을 창설하여 동독-헝가리 일주 여행이 만들어졌는데, 그 때 헝가리에서 [[10달 혁명]]으로 인해 [[헝가리]] 공산당 정부가 무너지자 범유럽 피크닉을 하던 동독 주민 수백명이 개방된 오스트리아 국경으로 탈출했다. 이로 인해 범유럽 피크닉은 중단되었다.
범 유럽 피크닉 (과거 유럽 피크닉, 헝가리어 : Páneurópai piknik, 독일어 : Paneuropäisches Picknick)는 1989 년 8 월 19 일, 오스트리아 부르겐란트 주 파고드는 헝가리 령 Sopron에서 열린 정치 회담. 피크닉 사건, 유럽 피크닉 계획이라고도 불린다.
 
이 정치 집회에는 서독 망명을 요구하는 1000 명 정도의 동독 시민들이 참여했다. 이 때 그들은 일제히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어 망명을했다. 후 베를린 장벽 붕괴로 이어지는 역사적인 사건이다.
 
목차 [숨기기]
1 배경
2 범 유럽 소풍 개최
3 사건의 여파
3.1 동독에 미치는 영향
3.2 헝가리에 미치는 영향
3.3 소련의 움직임
4 다음
5 외부 링크
 
배경 편집
1980 년대 후반에 폴란드와 헝가리는 민주화에 대한 모색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동독은 아직 보수적인 독일 사회주의 통 일당 국가 평의회 의장 에리히 호네커 국가 보 안성 (비밀 경찰)을 이용하여 국민에 대한 단속을 강하게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89 년 5 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을 개방한다는 뉴스가 뛰어들어 오면 많은 동독 시민은 헝가리 오스트리아를 거쳐 독일에 갈 것이 아닌가 생각 시작했다.
 
당시 동독은 여행 허가제, 당연히 서쪽에 여행은 허용되지 않으며, 동쪽으로의 여행이 허용 가능성이 높았다. 헝가리까지는 비밀 경찰에 눈총을받지 않고 합법적으로 국경을 넘어지고, 헝가리에 도달할 경우 어떻게든 오스트리아 통해 서독에 월경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하고 많은 사람들이 헝가리에 여행 허가서를 가지고 하여, 헝가리로 건너가 그대로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도 넘어 서독에 가려고 계획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러나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이 개방됐다고해도, 통행을 허용하는 것은 헝가리의 여권을 가진 사람만이 동독 시민이 통행을 허용하는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이것은 그들이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까지 가서 처음으로 밝혀진 것이었다. 결과적으로 1989 년 8 월 초 무렵에는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에 국경을 요구 동독 시민 넘치는되었다.
 
범 유럽 피크닉 개최 [편집]
이런 상황에서, 헝가리에서 민주화를 요구하는 민주 포럼 및 기타 민주화를 요구하는 세력은 다소 억지로라도 그들을 월경시켜 버리자,라고 생각하게되었다. 이미 비 공산당 정치 세력의 활동이 인정되지 헝가리에서는 이러한 민주화를 요구하는 운동이 활발 해지고 있었다. 오스트리아 측면에서 과거 오스트리아 - 헝가리 제국 황실의 합스부르크 로토린겐의 당주이다 오토 폰 합스부르크가이 운동을 지원했다. 또한 헝가리의 내무성은이 운동을 묵인하기는 커녕, 알 수없는 형태로 허리를 누를 수 있도록 노력했다.
 
이렇게 1989 년 8 월 19 일, 헝가리 오스트리아 국경 지대에 속하는 Sopron에서 범 유럽 피크닉이 열렸다. Sopron가 뽑힌이 도시가 헝가리에서 뛰어나, 오스트리아 령으로 파고드는식으로되어 있으며, 3 면이 오스트리아에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오스트리아 탈출하기 쉽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 이 집회에 참가하면 국경을 넘어 수있다는 정보는 인근 일대에 체류하고 있던 동독 시민에 암암리에 전해져, 약 1000 명의 참가자가 몰려들었다. 이 집회는 명목으로 "유럽의 미래를 생각하는 모임"였다. "민주 포럼"대표와 오토 폰 합스부르크 검사를 자칭하는 인물의 인사가 끝나거나, 끝나지 않는 하나에 참가자들은 속속 국경을 넘어 시작했다. 내무성은 미리 국경 문에 하나를 개방하고 있으며, 이곳의 국경 경비대는 사전에 상부에서 사태를 묵인 무장 금지를 명할 수 있었다.
 
게다가 실제로 그 자리에 있던 대원들은 단순히이 사태를보고도 못 본 척하기는 커녕 사후 신문에 게재된 사진이나 TV 보도에서 부모와 손을 놓고 굴러 버린 아이를 안아 올리는 경비병도 있었다. 이렇게 한여름 주말 피크닉은 성공 리에 막을 내렸다.
 
사건의 여파 [편집]
동독에 미치는 영향 [편집]
피크닉에 성공했다고 뉴스는 순식간에 동독 사이에 퍼지고 더 많은 동독 시민이 헝가리와 체코 슬로바키아 오스트리아, 서독 국경 지대에 몰려들었다. 양국 정부 모두 동독 정부와의 관계 악화를 걱정하고, 피크닉 때처럼 "여기에 눈을 쏟아"그다지 수 없게되어 있었다. 부다페스트와 프라하의 서독 대사관, 그리고이 운동에 협력하는 시설은 동독에서 탈출 사람들로 넘쳐 마치 난민 캠프의 양상을 띠고왔다. 양국 정부와 서독 정부는 협의 결과 동독 시민 서독 여권을주고 서독에 이주시키는 手筈을 마련했다. 더 헝가리 이후 동독을 배려하는 것을 중지하고 당당하게 동독 시민 국경을 개방하도록했다. 동독 정부는 서독, 헝가리 정부에 대해 격렬하게 항의를했지만 뒷북, 동쪽에서 서쪽으로 사람의 움직임을 멈추는 능력은 동독에 남아 있지 않았다. 특히이 "난민"는 교육 수준이 높은 시민이 많이 포함되어 있었다고, 이대로 "두뇌 유출"이 계속되면 국가의 붕괴도 絵空事 아니다라고 말했다.
 
가을이되면, 동독 내에서도 라이프 치히와 베를린 등에서 여행 자유화, 민주화를 요구하는 시위가 빈발했다. 호네커 사태를 수습 할 수있는 힘은없고, 동년 10 월에 호네커은 퇴진에 몰리고, 결국 1989 년 11 월 9 일 베를린 장벽 붕괴에 정착 한것 일이되었다.
 
헝가리에 미치는 영향 [편집]
피크닉을 성공시킨 것은, 헝가리의 민주화 세력에 민주화를 추진해 나갈 더욱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또한 유럽으로의 회귀 생각은 더욱 강해질 것이되었다. 이미 일당 독재를 포기하고 있던 정부도 10 월 23 일 헝가리 사회당으로 개명하고 공산주의 체제는 종말을 고했다.
 
헝가리 경찰 당국이 피크닉에 가담해 일이 보도를 통해 알려 지자, 헝가리 정부는 동독 정부의 강력한 항의와 체류 동독 국민의 강제 송환 요청을 받는다. 그러나 동독의 강권적인 대응에 반대로 헝가리 정부는 "모든 책임은 국민에게 달아난 같은 나라 만들기를했다 동독 정부에있다"고 일축했다, 월경 희망자 서독 정부로부터 여권 및 오스트리아에 입국 비자를받을 준비하면 서독 여권 소지자에 대한 국경 개방을 공개적으로 실시하게되었다.
 
소련의 움직임 [편집]
그때까지 동유럽의 공산주의 국가의 정치를 좌지우지해온 소련 이었지만,이 사건과 관련해 서방을 도발하거나 헝가리에 제재를 가할 수 없었다.
 
어쨌든, 앞에서 동독의 민주화 세력에 점화 것이 바로 그 소련 최고 지도자 였다고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호네커 퇴진 지난 10 월 6 일,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동독 건국 40 주년 기념식에 참석했다. 그 때, 자신의 페레스 트로이카 추진을 밀었다 연설을했지만, 이로 인해 호네커 정권과 고르바초프 정권 사이에 알력이 생겼다. 민중은 호네커가 소련의 후원을 잃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 [편집]
사건 현장인 주변은 "범 유럽 피크닉 공원"으로 보전되어있다.
 
2001 년, Sopron을 포함한 훼루테 호수 / 노이지도라 호수 문화 경관이 세계 유산으로 등록되어있다. 이것은 범 유럽 피크닉 공원 일대도 포함되어있다
 
== 같이 보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