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오쩌둥: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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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장정|중일 전쟁}}
 
한편 [[국민혁명군|국민당군]]은 100만의 병력을 동원해 [[국공내전#반공산당 토벌전|제5차 토벌전]]을 시작하였다. 국민당에 파견된 독일 군사고문단의 [[독일군사고문단한스 폰 젝트]]의 조언으로 진지와 [[토치카]]를 구축하면서 천천히 진격했고, 이에 [[1931년]]부터 마오를 대신해 군사지휘권을 장악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의 [[보구]]와 코민테른에서 파견된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 (1900년)|오토 브라운]]은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다가 커다란 인명손실을 내었다. (양측이 모두 독일인 군사고문의 조언에 의해 움직였다) 또한 [[게릴라]]전을 수행하는 데 절대적으로 필요한 배후 촌락이 모두 국민당의 손에 넘어가 소비에트는 붕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1934년]] [[10월]] [[가을]], 공산당 지도부는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산시 성 (섬서성)|산시 성]]에 있는 근거지로 옮기기로 결정했다. 마오를 비롯한 중국공산당 지도부는 1만킬로미터를 걸어 결국 산시에 도착하였다. [[장정]] 도중 [[1935년]] [[1월]] 열린 [[쭌이 회의]]에서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은 붕괴하고, 마오에게 [[공산당]]의 절대적인 지도권이 넘어왔다. [[1935년]] [[10월]], 마오가 이끄는 부대는 [[티베트]]와 같은 소수민족 지역을 거쳐 목적지에 도달했고, [[1936년]] 국민당군의 토벌전을 피해 이동을 개시한 나머지 부대들도 이곳에 합류하였다.
 
[[파일:Mao1938a.jpg|thumb|200px|Right|피난 중 집무 모습 (1938년)]]